류백승 (柳百乘), 불후당공(不朽堂公), Ryu, Baek-Seung, 생몰년: 1652-1718, 세:22
肅宗朝 文臣, 檢漢城公派, 자 중거(仲車), 호 불후당(不朽堂)
죽계 인홍(竹溪 仁洪)의 6대손이요, 통덕랑 진(通德郞 溍)의 아들로 효종(孝宗) 3년 壬辰 11월 13일 김제 황산(金提 黃山)에서 태어났다.
겨우 말을 배울때 문득 문자를 해독하더니 12세에 연적명(?適銘)을 지어 이르기를『그릇은 작아도 공이 많으니 제(齊)나라 관중(管仲)이요, 속은 비었어도 겉이 아름다우니 한(漢)나라 진평(陳平)이라』하니 모두 세상에 뛰어난 재주라고 탄복하였다.
숙종(肅宗) 원년 乙卯(1675)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9년 癸亥(1683)에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 얼마 후 성균관(成均館)에 옮겨 가주서(假注書)로 경연(經筵)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왕이 강독(講讀)을 명하자 공께서 응대(應對)하여 강독(講讀)하는 음성이 맑고 해석이 정밀하므로 왕은 아름다이 여기고 공의 나이와 가계(家系)를 물었으니 참으로 특이한 은전이었다.
12년 丙寅(1686)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오르고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15년 己巳(1689)에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갔으니 이는 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함이었다. 이 고을이 본래 폐단이 많아 남들은 부임(赴任)을 모두 싫어하고 회피하였는데 공이 말씀하기를 “국록(國祿)을 먹는자가 어찌 고을을 가려서 가겠는가?”하고 부임하여 모든 조치를 법도있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였다. 그러나 권력층(權力層)의 미움을 받아 16년 庚午(1690)에 파직되어 18년 壬申(1692)에 연산(連山)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면(赦免)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25년 己巳(1699)에 복직되어 예조(禮曹),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27년 辛巳(1701)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使), 서천군수(舒川郡守)로 재임중, 어질고 관대하며 청렴하고 간결하게 백성을 다스려 두 차례나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포계(襃啓)를 얻고 만기로 교체되니 사민(士民)들이 수레를 붙들고 공의 떠남을 애석히 여기었다.
33년 丁亥(1707)에 모친을 여의고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당시 공의 나이 60이 가까웠는데도 예제(禮制)를 심히 엄정하게 행하다가 드디어 몸이 쇠약해져 몇 번이나 죽기에 이르렀다.
복(服)을 마친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39년 癸巳(1713)에 순천부사(順川副使)로 나갔다가 권간(權奸)의 무고로 파직을 당하였다. 왕이 그 억울함을 살피시고 유임(留任)을 특별히 명하였으나 공께서 궂이 사양하고 이로부터 관로(官路)에 발을 들이지 않고 6년동안 오직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년의 사업을 삼았다. 그리고 가절(佳節)을 당하면 관동(冠童)들을 거느리고 산수를 찾아 놀면서 시부(時賦)로 소일하니 가히 세속(世俗)을 초월한 기상이 있었다.
공이 소시(少時)에 간간히 중부 운강공(仲父 雲江公)을 따라 신독재 김 집(愼獨齋 金 集)선생을 배알 하였는데 선생께서 사랑하시고 문인(門人)의 열(列)에 두고자 하였으나 공은 문호계(門戶計)로서 과업(科業)에 종사하여 마침내 출사(出仕) 하였지만 만년에 후회 하시었다.
공은 자품이 맑고 용모가 단정하여 겉으로는 화유(和柔)한것 같았으나 안으로는 실로 견확(堅確)하여 이해(利害)로써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비굴(卑屈)한 태도를 보면 준열히 꾸짖었다.
또한 본성이 강개하여 기절(氣節)을 숭상하더니 일찍이 삼전도(三田渡)를 지내기를 『大淸皇帝功德碑』를 보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가련하다 한 조각 저 석물이여,
삼한의 수치를 길이 간직하였도다."
하니 지금까지 전송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을 곤두서게 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치되 반드시 충효(忠孝) 두 글자를 설명하고 세덕(世德)을 들어 거기에 욕됨이 없게 힘쓰도록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때는 곤궁한 백성을 사랑하고, 가난한 일가들을 보살펴 혼수(婚需)를 도와 때를 잃지 않도록 하였고, 관직을 그만 두고 집에 돌아와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웠으나 처신(處身)이 담담하였다.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이우당 조태채(二友堂 趙泰采)로 더불어 우의가 깊어 고상한 지취(志趣)가 부합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보통 사람에 넘어 많은 서적을 두루 읽었는데 한번 보면 문득 기억하고, 붓을 잡으면 문장(文章)을 이루어 말과 이치가 어긋남이 없었다.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이 북막(北幕)을 도우려 떠날 때 전송의 글을 공이 즉석에서 지어 주니 농암(農巖)이 가작(佳作)이라고 칭송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권세가(權勢家)에 발을 들여 놓지 않고 곤경에 처할지라도 또한 개의치 않고 개연히 말하기를 “사업(事業)과 공명(功名)은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데 있으나, 언어와 행동을 덕의(德義)에 쫓아 행하면 가히 근본을 세울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스스로 힘쓰지 않고 마침내 초목으로 더불어 썩게 되니 가히 부끄러운 일이다.”하고, 불후(不朽)로 그 당호(堂號)를 삼았다. 불후당(不朽堂)은 완산 양정촌(完山 良井村)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께서 당기(堂記)를 지어 공의 사행(事行)을 극찬(極讚)하였다.
숙종(肅宗) 44년 戊戌 9월 28일 돌아가시니 향년 67세 였다.
배위 진주소씨(晋州蘇氏)는 이인(爾寅)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어 내외 종당(內外 宗黨)에서 공경하고 복종하였으며 공보다 2년 후에 돌아가셔 지금 완주군 비봉면 봉덕산 소치 미좌(完州郡 飛鳳面 鳳德山 巢峙 未坐)에 합부로 모셔 있다.
3남 3녀를 두어 장자 일성 (一星)은 호 항간재(恒簡齋)인데 학행(學行)으로 누차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천거에 올랐고, 2자 일운(一運)은 종숙 백능(從凉 百能)후로 출계하고, 3자 일상(一相)은 영조(英祖) 5년 己酉(1729)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12년 丙辰(1736) 7월에 상소(上疏)로써 송우암(宋尤庵)과 송동춘(宋同春)의 피무(被誣)를 변명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며, 16년 庚申(174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 전적(典籍)을 거쳐 단암도찰방(丹巖道察訪)으로 나가 청렴과 검약을 스스로 지키고 자기의 봉급(俸給)을 덜어 부역(賦役)을 살피니 백성들이 청백비(淸白碑)를 세워 양세청백리(兩世淸白吏)라 일컫었다. 사위는 해주최일복(海州崔一復) , 경주이단항(慶州李端恒) , 연안이명윤(延安李明亂)이다.공의 유고(遺稿) 10여권이 있다. 회헌 조관빈(悔軒 趙觀彬)이 묘갈명을 짓고,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가 행장을 지었다.
고종(高宗) 6년 己巳(1869) 4월에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에게 묘갈명 추기(追記)를 받아 묘비(墓碑)를 개수(改竪)하였다.
후손은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金堤郡 孔德面 養山里)에 세거하고 있다.
※ 墓碣銘, 號譜, 鼓山集.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