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봉 (柳奉), 정재공(定齋公), Ryu, Bong, 생몰년: 1546-1604, 세: ,
류봉(柳奉) 정재공(定齋公), Ryu, Bong, 생몰년:1546-1604, 세:20
宣祖朝 倡義, 左相公派, 자 성숙(盛淑). 호 정재(定齎). 망기정(忘機亭)
증영의정 사공(贈領議政 思恭)의 장자 울산부사 위(蔚山府使 渭)의 증손이요, 금구현령 응상(金溝縣令 應祥)의 손이요, 진사(進士) 포은 경지(浦隱 敬智)의 2자로 명종(明宗) 원년 丙午생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더니 일찍이 산당(山堂)에서 글을 읽을 때 부모님이 새옷을 보내주었는데 동문(同門)중에 일찍 부모를 잃은 학생이 <나는 어찌 부모가 계시지 않은가>하고 서러워 하면 공이 문득 그에게 옷을 내주곤 하였다.
나이 열두살 되던 해 부친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므로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드리고자 함에 모친께서 힘껏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내 상(喪)을 당했는데 객지(客地)가 되어 근친(近親)이 없는지라 열살난 어린 아우 명(蓂)과 함께 염습을 유감없이 행하고 장례를 마친 후 묘소 아래 작으마한 집을 짓는 한편 샘을 파서 물을 얻고 조석(朝夕)으로 성묘하며 날마다 한차례 씩 모친을 가서 뵈옵는등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고 여가(餘暇)로 학문에 힘써 문사(文詞)가 날로 진취하더니 선조(宣祖) 9년 丙子(1576)에 아우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동방(同榜)으로 급제, 진사(進士)가 되었다.
21년 戊子(1588)에 모친을 여의어 집례(執禮)를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고 복(服)을 마침에 머리가 다 희어졌었다.
일찍이 중봉 조 헌(重峰 趙 憲)을 스승으로 섬겨 학문에 열중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이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과 병기를 조달하였으며 금산(錦山) 싸움에서 패하여 중봉(重峰)이 죽음에 글을 지어 제사지내고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통분히 여기었다.
29년 丙申(1596)에 호서(湖西)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난리를 일으켰는데 이웃 고을에서 그에 동조하는자가 많은지라 공께서 그들을 불러 역순(逆順)의 이치를 들어 깨우치니 모두 크게 깨닫고 공에게 협조하였다. 마침내 그들을 거느리고 홍주목사 홍가신(洪州牧使 洪可臣)의 진(陳)에 합류(合流), 적을 토벌하니 후에 청난원종훈(淸難原從勳)에 책록되었다.
37년 甲辰 11월 5일에 향년 59세로 돌아가시니 부여 석성 염창등 고봉 계좌(扶餘 石城 염倉嶝 高峰 癸坐)에 안장되었다.
판서 유최기(判書 兪最基)가 공의 묘표를 지었는데 丙申년의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공의 충성과 신의가 본래 사람들에게 미덥지 않았더라면 죽는 일에 임하여 의기(意氣)의 감동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하였다.
배위 면천복씨(沔川卜氏)는 참봉 운(參奉 雲)의 따님으로 5남 3녀를 두었다.
장자 선춘(先春)은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아우 형춘(馨春)으로 더불어 한계 장응기(寒溪 張應起)의 문하에 출입하여 행의(行誼)가 드러났으며, 2자 승춘(承春)은 종숙 전(從叔 筌)후로 출계하였다. 3자 형춘(馨春)은 백씨(伯氏)로 더불어 한계(寒溪)의 문하에 출입(出入), 당시에 추중되었으며, 4자는 부춘(富春)이요, 5자 수춘(秀春)은 생원(生員)이다. 사위는 신 회(辛 誨), 정세길(鄭世吉). 진사 이시진(進士 李時震)이다.
후손이 부여읍 염창리(扶餘邑 염倉里)에 집단세거하고 있다.
※ 고山集, 墓表, 丁巳譜,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