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봉령(柳鳳齡), 원주공(原州公), Ryu, Bong-Ryeong, 생몰년:1678-1743, 세:23
英祖朝 蔭仕. 夏亭公派, 자 계연(季延).
대사간 상재(大司諫 尙載)의 2자로 숙종(肅宗) 4년 戊午 3월 7일생인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수(溫粹)하고 단결(端潔)하여 수식(修飾)을 일삼지 않고, 용모가 준수하고 언행이 정직하여 매양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분별함에 있어 영명(英明)하므로 듣는 이가 모두 놀래었다.
부친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6세에 백부 약재공(約齋公)에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한번 들으면 문득 알아 쇄소 응대(滯掃 應對)의 절차는 물론 문사(文詞)가 날로 진취되었다. 11세에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선생에게 논어(論語)를 배우고 이어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선생에게 글을 배워 성동(成童)전에 구경 (九經)을 능히 통달하고 시율(詩律)과 필법(筆法)에도 조예가 깊어 제공(諸公)의 기대한 바 컸었다. 장성함에 풍채가 훌륭하여 바라보면 의연(穀然)하여 범하지 못할 기색이 있었고, 다가서면 흉금(胸襟)이 쇄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비인(鄙吝)한 생각을 잊게 하였다. 이로서 사림(士林)간에 추중한 바 되었다.
부친께서 여러 고을 수령(守令)을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청렴 결백하여 가장 집물(家裝 什物)이 별로 없으므로 매양 부임할 때 마다 공께서 원근에서 빌리어 미리 준비하였으며 한편 부친께서 연로(年老)하시어 말에 오르고 내릴때면 항상 부축하여 드리고, 혹 진귀한 과실이나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싸가지고 와서 드리었다. 그리고 친환(親患)이 계시면 약(藥)을 먼저 맛보아 올리고, 침을 맞으시면 자신에게 먼저 시험하였으며, 곁을 떠나지 않고 시병(侍病)에 정성을 다하였다.
숙종(肅宗) 20년 甲戌(1694)에 모친 상을 당하여 여묘(廳墓)로서 복(服)을 마치고 22년 丙子(1696)에 백씨 상(伯氏 喪)을 당하여 애통한 나머지 병을 얻었으나 그러나 부친이 생존하여 계심으로 감히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29년 癸未(1703)에 부친 상을 당하여 피눈물로 3년을 거상(居喪)하되 조석 상식(上食)에 비록 채장(菜醬)이라도 친히 간검(看檢)하여 지체(志體)의 정성을 다하고, 매서운 겨울 무더운 여름에도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곡읍(哭泣)을 그치지 않으니 보는 이마다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복(服)을 마치고 32년 丙戌(1706) 9월에 비로소 음사(蔭仕)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고, 34년 戊子(1708) 7월 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에 승진하여, 36년 庚寅(1710) 4월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옮기었다. 그 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 ,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두루 거쳐 40년 甲午(1714) 4월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 나가 청렴 결백한 정사(政事)로서 백성들에 앞서 모범을 보이고, 문첩(文牒)에 사의(辭意)가 정연하므로 본도관찰사 유척기(本道觀察使 兪拓基)가 칭탄하기를 『현령 류모(縣令 柳某)는 반드시 유가서(儒家書)를 종사(從事)할 분이다. 』하였다. 어느 여름에 날이 가물었는데 공께서 글을 지어 기우재(祈雨祭)를 지낸 후 단비가 내림으로 백성들이 지성에 감동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이 고을에 재임 6년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는 등 20여조의 훈사(訓辭)를 민간에 반포하여 유화(儒化)가 크게 행해지니 이민(吏民)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치정(治政)을 기리었다. 45년 己亥(1719) 7월 재령군수(載寧郡守)로 나가 역시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듬해에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으로 옮기었다.
경종(景宗) 원년 辛丑(1721) 11월, 예천군수(醴泉郡守)로 나갔는데 때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구휼(救恤)하는데 전력을 다하니 임금으로 부터 표리(表裏) 하사(下賜)의 은전이 있었다. 영조(英祖) 원년 乙巳(1725) 4월, 탄핵(彈劾)을 받고 파직되었더니 곧 죄상(罪狀)이 풀려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제수되어 번잡한 송사(訟事)를 신속공정하게 처리하고 학교(學校)를 중수하여 사자(士子)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봉록(俸祿)을 덜어 곤궁한 사람들을 돕는등 예천(醴泉)에 있을 때와 같이 하므로써 또 임금으로부터 포상(褒賞)을 받았다.
3년 丁未(1727) 7월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11월에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를 거쳐 이듬해 정월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에 옮겼다가 3월에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승진, 부임하여 세족(勢族)의 횡포를 근절시키니 향인(鄕人)들이 상쾌히 여기고 공의 치화(治化)를 노래 불렀다. 5년 己酉(1729)에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기근(饑饉)이 극도에 달하자, 공께서 관찰사(觀察使)에게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으므로, 또 아뢰기를 『백성들이 지금 양식이 떨어져 죽기에 이르렀는데 관고(官庫)에 곡식은 어데다 쓰려고 기다리겠는가』하니, 관찰사(觀察使)가 비로소 허락하여 백성들을 구하였다.
9년 癸丑(1733) 3월, 선혜청랑청(宣惠廳郞廳)에 제수되고 이듬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가 역시 흉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지성껏 진휼(賑恤)하여 도신(道臣)의 포계(褻啓)로 포상을 받고, 체임하여 돌아오니 상주 백성들이 공의 덕화(德化)를 추모하여 화상(晝像)을 그려 제사를 지내었다.
14년 戊午(1738) 정월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나가 역시 선정(善政)으로 백성들이 입석 송먹(立石頌德)하고, 16년 庚申(1740) 2월 천안군수(天安郡守)로 체임하여 돌아오니 의성(義城)사람들이 『우리태수(太守)께서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사랑하였는데 어찌 차마 보내겠는가?』하고 울면서 따라와 천안(天安)으로 이거한 이가 수십호(數十戶)였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辭職)하였으나 천안 사인 권중태(士人 權重台)등이 유임(留任)을 간청하여 그대로 유임했다가 18년 壬戌(1742) 5월 공주판관(公州判官)으로 전임하여 역시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덜어주는데 전력하였다. 이로서 당시의 대신인 조현명(趙顯命) , 최석정(崔錫鼎) , 오도일(吳道一)등이 각기 칭탄하여 마지 않았다.
19년 癸亥 3월 17일, 향년 66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5월 광주(廣州)고을 남쪽 대왕 율현 손좌원(大旺 栗峴 巽坐原)에 안장되었다.
이조판서 전주이성중(吏曹判書 全州李成中)이 공의 행장을 지었다.
배위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참판 동욱(參判東郁)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두어 아들은 명원(明違)이요 따님은 전주이시계(全州辛時啓)에게 출가하고 서출에 1남 1녀를 두어 아들은 만호 문원(萬戶 文遠) , 한원(漢遠) , 기원(箕遠) , 광원(光遠) , 심원(心遠)이요, 따님은 고령박명수(高靈朴明秀) , 고령박성하(高靈朴聖河) ,남양홍백함(南陽洪百涵) , 창녕성덕휴(昌寧成德休) , 함종어석건(咸從魚錫健)에게 출가하였다.
장자 명원(明遠)이 효행(孝行)이 뛰어나 부모의 거처를 조석으로 살펴, 여름이면 시원하게 겨울이면 따습게 해드리고, 반찬 대접이며, 집 안밖으로 청소등에 이르기까지 지성을 다하여 뜻을 받들었다. 부친께서 공주판관(公州判官)에 재임중 학질(瘧疾)이 심하여 집에 돌아와 병석에 계실때 주야로 의대(衣帶)를 풀지 않고 여러 달을 시탕(侍湯)은 물론 제반 간호에 지성을 다하였다. 하루는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맥도(脈道)가 이미 그쳤으니 회생할 소망이 없다』하거늘 공이 급히 침실로 들어가 칼로 팔뚝을 찢어 사발에 피를 답아 부친의 입에 주입(注入)하였으나 효험이 없거늘 또 열 손가락을 베어 계속 피를 주입하니 반나절이나 되어 온기가 돌더니 석양녘에 소생하시었다. 이 소문이 전파되어 드디어 선비들이 그 효행을 천거하려 하는데 공이 굳이 말려 그치었다. 그후 양친(兩親)의 상중에 조석으로 성묘하여 풍우(風雨)와 한서(寒暑)에도 폐하지 않고 죽(粥)으로 3년을 마치었다. 일찍 독서를 즐기더니 영조(英祖) 14년 戊午(1738)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6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일찍 삼락헌(三樂軒)이라 자호하고 말하기를 『독서를 좋아하니 장부의 낙이요, 다행히 진사가 되었으니 선비의 낙이요, 시골에서 한가히 늙었으니 노인의 낙이라』하였다.
※ 行狀.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