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봉서(柳鳳瑞), 교리공(校理公), Ryu, Bong-Seo, 생몰년:1654-1699, 세:23
肅宗期 文臣. 夏亭公派, 자 계휴(季休).
영의정 약재 상운(領識政 約齋 尙運)의 장자로 효종(孝宗) 5년 甲午 12월 17일 한양(漢暘)에서 태어났다.
여문(?文)에 조예가 있더니 숙종(肅宗) 10년 甲子(1684)에 진사과(進士科)에 장원하고 15년 己巳(1689)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한림(輸林)으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 이조좌랑(吏曹佐郎)을 거쳐 21년 乙亥(1695) 6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옮기고, 동년 9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서 상소를 올려 관리의 비위를 규탄하고, 이듬해 2월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 暗行御史)로 나가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적발함과 아울러 치적이 현저한자의 포상(褒賞)을 주달하였다.
동년 10월 부제학 조상우(副提學 趙相愚)의 추천으로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고 23년 丁丑(1697) 7월 홍문관부교리(弘文館訓校理)에 전임하여 상소로써 외방 관원(官員)의 취렴(聚斂)의 폐해를 근절토록 그들의 파직을 청하고, 동년 9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승진하였다. 동년 12월에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 발령되었는데, 부임 수일전에 홍문관(弘文館)의 건의로써 이듬해 정월 흥양현감(興陽縣監)에 고쳐 제수되었다.
25년 已卯(1699) 정월, 함경도병마평사(咸鏡道兵馬評事)로 전직되어 동년 4월 16일 경성(鏡城) 임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였다.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류봉서(柳鳳瑞)는 바로 영의정 류상공(領議政柳相公)의 아들로 전에 김춘택(金春澤)부자의 일을 논박하여 사기(辭氣)가 자못 과격하였으나 그러나 대체(大體)는 정직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출척(黜斥)되어 험한 지역에 보직되었다가 겨우 돌아와 또 북변(北邊)으로 나가 병으로 죽으니 듣는 이마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 』하였다.
배위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약제(若濟)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태원(太垣)은 숙종(肅宗) 40년 甲午(1714)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사위는 대사헌 한산이명언(大司憲 韓山李明彦) , 참봉 파평윤상첨 (參奉 坡平尹尙噡)이다.
공의 묘소는 양천군 장군소면 은행정리 선영 안산 손좌(陽川郡 將軍所面 銀杏亭里 先塋 案山 巽坐)에 배위와 합부인데, 약천 남구만(藥泉南九萬)이 비문을 짓고, 아우 봉휘(鳳輝)가 비문을 썼다.
戊申(1968)에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楊平郡 玉泉面 龍川里) 설매치 선영 자좌(雪梅峙 先塋 子坐)로 이장하였다.
※ 朝鮮王朝實錄 , 國朝榜目 , 人物誌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