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병훈 (柳世勛), 치헌공(恥軒公), Ryu, Byeong-Hoon, 생몰년: 1564-1631, 世 : 21
충경공 후손(後孫), 자(字)는 신재(愼哉), 號 恥軒, 父 沃
충경공(忠景公) 양(亮), 경생, 현령(縣令) 적(績)에 이르러 서울로부터 영남(嶺南) 안음현(安陰縣)에 이거(移居)하고, 고조는 사직(司直) 효손(孝孫)으로 합천(陜川)에 이사(移徙)하였고, 증조 상호군(上護軍) 구년(龜年), 조부 현감(縣監) 희영(希榮), 아버지 충의위(忠義衛) 옥(沃)이며 어머니는 의춘옥씨(宜春玉氏)인 장령(掌令) 자광(自光)의 따님이다.
선조(宣祖) 임진(壬辰)에 왜구(倭宼)가 대창(大搶)하기에, 향병(鄕兵)을 규합(糾合)하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좇아 동성창의(同聲倡義)하고 정유(丁酉) 1597에 또 화왕성중(火旺城中)에 다달아 협심(協心)하고 찬획(贊劃)하다가 난리가 그침에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아니하다. 당시 동군(同郡) 정인홍(鄭仁弘)이 백두(白頭) 중망(重望)으로 과장(誇張)이 심하거늘, 공(公)이 증악(憎惡)하여 두릉(杜陵) 고동(古洞)에 피지(避地)하고 그 집을 치헌(恥軒)이라 명명(命名)하였다. 후에 인홍(仁弘)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내방(來訪)하거늘 공(公)이 질병(疾病)을 핑계하여 보지 않고 날마다 헌중(軒中)에 정처(靜處)하고 가묘(家廟)에 신알(晨謁)한 외(外)에는 독서(讀書)를 폐하지 않으니 학문(學問)이 대성(大成)하다. 소학(小學)과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독신(篤信)하여 조존(操存)하고 함양(涵養)하는 근본(根本)을 삼고 더욱 주역(周易)과 춘추(春秋)에 조예(造詣)가 깊어서 연구(研究)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계몽십훈(啓蒙十訓)과 경전제영(經傳諸咏)과 자경(自警) 등 시(詩)를 읽어보면 그 조예(造詣)의 불천(不淺)함을 가히 알 것이다.
인조(仁祖) 신미(辛未) 1631년 10월 6일 졸(卒)하니 수(壽)가 68이라, 임종(臨終)에 군북(郡北) 약사방(若士坊) 자좌원(子坐原)에 안장(安葬)하다.
배(配)는 파평윤씨(坡平尹氏)니 대승(大承)의 따님이요 감사(監司) 황(璜)의 손녀(孫女)이며 9남2녀를 두었으니 남(男)은 돈선(敦善)과 돈서(敦恕)와 요사(夭死)한 돈의(敦義)와 돈성(敦省)과 돈양(敦養)과 돈함(敦諴)과 돈흠(敦欽)과 출계(出系)한 돈검(敦儉)과 돈근(敦謹)이요, 서(婿)는 신여망(申汝望)과 김팔고(金八顧)이다.
※ 무자보墓碣銘
[입력: ryuj 1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