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차달 (柳車達), 대승공(大丞公), Ryu Cha-Dal, 생몰년: ?-?, 세: 1, 문화류씨 시조
공은 신라(新羅) 말기에 유주(儒州), 지금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묵방동(黃海道 信川郡 文化面 墨坊洞)에서 태어났는데 가세(家勢)가 심히 부호(富豪)였다.
후삼국(後三國) 시대에 태조 왕 건(太祖 王 建)이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하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할 즈음 군량이 부족하여 난처한 처지에 있었다. 이 때 공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하여 고려(高麗)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께서 공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훈호(勳號)와 대승(大丞)의 관작을 내리었다.
묘소는 문화 구월산 남록 인좌(文化 九月山 南麓 寅坐)에 모셔져 석의(石儀)가 갖추어 있다.
이분이 곧 문화류씨의 시조이며, 그 아들 효금(孝金)은 좌윤(佐尹)이다.
조선(朝鮮) 철종(哲宗) 14년(1863)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대제학 남병철(大提學裟 南秉哲)이 비문을 짓고, 이조참판 서형순(吏曹參判 徐衡淳)이 비문을 썼다.
1946년에 나주군 본양면 신촌(羅州郡 本良面 莘村), 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光州市 光山區 東湖洞)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로부터 매년 음2월 15일에 향사를 받들고 있으니 이른바 대동사(大東祠)이다. 그리고 1960년에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公州郡 反浦面 鶴峰里) 동학사(東鶴寺) 경내에 있는 동계사(東鷄祠)에 추배(追配)하여 매년 음 3월 15일과 10월 24일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대승류공차달묘표
공의 성은 류씨(柳氏)로 휘는 차달(車達)이다. 고려 태조(太祖)가 남방으로 백제를 칠 때에 공이 수레를 내어 삼국통일에 크게 공을 세웠다. 이로써 공을 벽상공신에 책록하고 대승의 관직을 내리었는데 돌아가심에 문화 구월산에 장사하였으니 이 분이 곧 우리 류씨의 시조이시다.
고려시대부터 우리 조선조까지 대대로 이름난 관직이 있었고 내외 후손이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렵다.
묘소에 예전 비석이 있었는데 세대가 오래되어 민몰됨에 지방사람 중에 몰래 이 부근에 장사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18대손 찬성 관(贊成 灌)이 본도관찰사로 있을 때 즉시 그 무덤을 옮기도록 하고 이어 묘소의 복구를 외후손인 홍감사 춘경(洪監司 春卿)에게 부탁하니 홍감사가 가정(嘉靖) 22년 계묘(癸卯: 1543), 즉 중종(中宗) 38년에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로부터 43년 후 만력(萬曆) 을유(乙酉:1585), 즉 선조(宣祖) 18년에 17대손 관찰사 희림(希霖)이 다른 빗돌로 바꾸고 아울러 예전 기록대로 새기었다.
그로부터 97년 후 숙종(肅宗) 신유(辛酉:1681)에 21대손 상운(尙運)이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외직에 있는 일가들과 의논하여 다시 비석을 세워 그 전후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제 신유년이 거의 200년이 되어 글자가 이지러짐으로 인하여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기영(基榮)이 두루 살펴보고 슬피 탄식하며 차마 인멸할 수 없어 간략히 석의를 갖추고자 자그만 비를 세워 문득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 곳이 대승공의 묘소임을 알도록 하였다.
전후의 모든 비문은 이미 보첩에 실려 있으므로 새 빗돌에 아울러 새기지 않는다.
때는 숭정(崇禎) 후 넷째번 신유(辛酉:1861), 즉 철종(哲宗)
12년 10월 일
牒不克幷刻于新石
時崇禎四辛酉十月
日二十七代孫基榮謹誌 |
周省咨嗟不忍湮滅略修石儀仍竪短碣俾後人知大丞之藏前後陰記旣載譜 |
孫尙運按關西謀于宗改竪而記顚末今去辛酉殆二百餘年字泐不可讀基榮 |
曆乙酉十七代孫觀察使希霖易以他石幷刻前誌後九十七年辛酉二十一代 |
墓之復囑外裔洪按使春卿以嘉靖二十二年癸卯竪石而識之後四十三年萬 |
記墓道舊有碑代遠泯沒土人有竊葬者十八代孫贊成灌按本道卽令遷之仍 |
卒葬文化九月山寔爲吾柳之鼻祖焉迄麗代至我朝世有名公內外裔殆難勝 |
公姓柳氏諱車達麗祖南征百濟公出車乘克贊統一之功策公壁上勳位大丞 |
[입력: JR 09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