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국 (柳昌國)

류창국(柳昌國), 집의공(執義公), Ryu, Chang-Gook, 생몰년:I579-1637, 세:22
仁祖朝 倡義. 中門祇候使公派, 자 응시(應時)

중랑장 중의(中郎將 仲宜)의 8대손이요, 선교랑희문(宣敎郎 熙門)의 2자인데 계부 흥문(季父 興門)후로 출계하여 그계자(系子)가 되었다.
선조(宣祖) 12년 己卯 12월12일 진천(鎭川)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므로 숙부 필선공(弼善公)께서 큰 재목이라 칭찬하더니 장성함에 언어가 간결하고 희롱이 드물었다. 한편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의리(義理)를 들으면 반드시 강개(慷慨)하여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으므로 향당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임진애란(壬辰倭亂)에 겨우 14세로 가족을 따라 산골로 피란하였는데 문득 왜적들이 앞길을 침범하자 공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적병이 활을 쏘려다가 공의 기골(氣骨)이 엄연함을 보고 감히 화살을 당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에 청국(淸國) 오랑캐들이 침범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만노성(萬弩城)으로 들어갔는데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모여 공에게 의지하고 드디어 공을 의병장(義兵將)에 추대하였다. 그런데 성중(城中)에 마실 물이 없는지라 공께서 하늘에 기도하고 땅을 파서 좋은 샘물을 얻으니 사람들이 신인(神人)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무릇 싸움에 세 번이나 크게 이겨 적병 30여명을 참획하니 온 성중이 이를 힘입어 온전함을 얻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요 우리를 살려주신 분은 류공이라"하였다. 그후 의사(義士) 삼백인을 거느리고 서도(西道)로 달려가 왕을 뵈오려다 용인(龍仁)에 이르러 화의(和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끝에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관찰사 정공세규(觀察使 鄭公世規)가 장계(狀啓)를 올려 통예원인의(通禮院引儀)에 제수되고, 송공국택(宋公國澤). 조공문수(曺公文秀)가 서로 주달(秦達)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T丑 9월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9세였다.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봉사 경서(奉事 散恕)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세집(世楫)은 동지(同知)요, 세장(世檣)은 중숙 형국(從叔 亨國)후로 출계하고, 세로(世櫓)이며, 사위는 광산김후창(光山金後徵), 전주이대석(全州李大錫)이다.
공의 묘소는 진천 성암산 직동 자좌(鎭川 聖岩山 直洞 子坐)에 배위와 합부로 모셔 있다.
숙종조(肅宗朝)에 호조좌랑(戶曹佐郎)에 증직되고 철종(哲宗) 2년 辛亥(1851)에 사헌부집의 (司憲府執義)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공의 유사(遺事) 1권이전하고 있다.
봉암 채지홍(鳳巖 蔡之洪)이 전(傳)을, 정산 채복휴(定山 蔡複休)가 발문(跋文)을, 신암 정재경 (愼庵 鄭在裝)이 묘지(墓誌)를, 단운 민병승(丹雲 閔丙承)이 행장(行狀)을, 창상 이상영(滄上 李商永)이 묘표(墓表)를, 노탄 송규헌(老灘 宋奎憲)이 실기(責記)를, 각기 지었다.
※ 追先錄, 世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