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철(柳澈), 원주공(原州公), Ryu, Cheol, 생몰년:1548-1627, 세:21
仁祖朝 蔭仕. 忠景公派, 자 언정(彦淨). 호 묵재(點齋).
관재 정수(觀齋 延秀)의 현손이요, 시직 광찬(侍直 光纘)의 계자(系子)이다. 생부(生父)는 현감 광진(縣監 光縉)이다.
명종(明宗) 3년 戊申생인데 송암공(松庵公)께서 신원(伸寃)된 후 문음으로 발탁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宣祖) 25년 壬辰(1592)에 군위현령(軍威縣令)으로 나갔는데 동년 4월 왜구(倭寇)가 쳐들어와 밀어 닥치거늘 공이 군병(軍兵)을 거느리고 나가 고을을 굳게 지키었다. 이듬해 5월 부인 김씨(金氏)의상을 만나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30년 丁酉(1597) 정월에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
수년 후 37년 甲辰(1604)에 서흥부사(瑞與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푸니 동년 10월에 황해도어사오백령(黃海道御史 吳百齡)이, 이듬해 2월에 어사 이지완(御史 李志完)이, 39년 丙午(1606) 3월에는 어사 윤효선(柳史 尹孝先)이 각기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서흥부사 류 철(瑞與府使 柳 激)은 정사에 힘써 처사(處事)가 자상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부역(賦役)을 공평히 하고 형벌을 간결하게 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으니 포상(褻賞)을 청합니다. "하니 이로써 나라에서 포상의 은전을 내렸다.
광해군(光海君) 9년 丁巳(1617)에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으로 있다가 정사가 어지럽자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 났다.
인조(仁祖)가 등극한 후 다시 등용되어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었더니 이듬해 甲子(1624) 2월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5년 丁卯 8월25일 돌아가시니 향년 80세로 과천 입의동(果川 立義洞) 시직공(侍直公)묘소 계하에 안장되었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배위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첨사 숭의(僉使 崇義)의 따님으로 4남을 두었으니 증화(增華)는 강릉참봉(康陵參奉)이요, 익하(益華)는 회인현감(懷仁縣監)이요, 태화(泰華)는 승의랑(承義郞)이요, 득화(得華)는 승훈랑(承訓郞)이다.
※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