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충립 (柳忠立), , Ryu, Choong-Rip, 생몰년: 1582-1620, 세: 22
중문지후사공 후손(後孫), 자 가이(可移), 자신의 손자, 희갱(希鏗)의 2남, 효립의 弟,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주서 및 겸설서에 제수되었고, 1612년(광해군 4) 정언, 수찬을 역임하고, 그 이듬해 이조좌랑 재직시 박사(朴師)를 탄핵한 사건으로 왕의 미움을 받게 되자 스스로 지방관을 요청하여 서원현감에 제수되었다.
그 뒤 문학, 응교, 보덕, 사복시정을 거쳐 사인(舍人)으로 재직하면서 한효순(韓孝純)·이이첨(李爾瞻) 등이 발의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였다. 그 뒤 직제학에 올랐다.
1619년(광해군 11) 친적도감(親籍都監)의 도청(都廳)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또 도체찰사종사관의 직책과 어사의 임무를 띠고 각 도의 군사를 하유(下諭 : 지방 관원에게 타이르는 왕의 분부)하였고, 서쪽 변방의 군무를 살피고 돌아와서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관직이 공조참의, 대사성에까지 이르렀다. 사관들의 인물평을 보면 광해조의 외척 류씨들 중에서 인품이 뛰어나고, 몸가짐이 매우 발랐다 한다.
配 숙부인 여흥민씨 父 판서 悌男
墓 矢谷
※ 무자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입력: ryuj 1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