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담후 (柳譚厚)

류담후(柳譚厚), 결청재공(潔淸齋公), Ryu, Dam-Hoo, 생몰년:1623-1686, 세:22
肅宗朝 文臣, 夏亭公派, 자 정부(正末). 호 결정재(潔精齋).

영암군수 희정(需崙郡守 希汀)의 5대손이요. 하담공량(荷漂 公亮)의 손이요, 절초당 훤(節初堂 萱)의 3자로 인조(仁禮) 원년 癸亥 9월24일 이천(利川)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곧고 점점 자람에 학문에 몰두하더니 약관(弱冠)에 경서(經書)를 통달하여 호종(孝宗) 2년 辛卯(1651)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이듬해 모친 상을 당하여 피눈물로 복제 (服制)를 마치었다.
부친께서 또한 숙환(宿患)이 있어 자주 병석에 앓고 있는데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계제 (季弟)가 연이어 돌아가시는 참변을 당하고 공께서 홀로 친환(親患)을 시중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뜻을 어김이 없었다. 한편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역학(易學)에 전력하여 때로는 침식(寢食)을 잊기도 하였다.
현종(顯宗) 2년 辛丑(1661)에 부친 상을 당하여 제반 절차를 전상(前喪)과 같이 정레(情禮)를 다하고 때가 겨울인데도 주야로 빈소(殯所)를 떠나지 않고 울부짖더니 그로 인하여 담증(痰症)을 얻어 난치병이 되었다.
6년 乙巳(1665)가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더니 10년 己丙(1669)에 외직으로 경안도 찰방(慶安道 察訪)에 임명되었다. 12년 辛亥(1671) 가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승진하여 교정랑(校正郎)을 겸하고 이로부터 외직에 나가지 않으면 교수(校警)에 참여하였으니 당시 공의 신망이 중함이었다. 동년 겨울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고 이어 병조좌량(兵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나가 본도의 초시(初試)를 공정히 관장하였다.
14년 癸丑(1673) 겨울에 병조정랑(兵曹正郎)에 승진하고,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시강원사서(恃講院司書)에 전직되어 이로부터 삼사(三司)를 두루 역임한 후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숙종(肅宗)께서 즉위하신 후 동래접위관(東萊接慾官)으로 나가 교활한 왜사(倭使)를 잘 달래어 무사함을 얻으니 동래부사 어진익(東萊府使 魚震翼)이 서울에 돌아와 사람을 만날때마다 이르기를 "류공(柳公)은 훌륭한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로써 부하를 잘 다스리고 왜인(倭人)을 굴복케 하였다."고 하였다.
乙卯(1675)에 성균관사예 겸사헌부장령(成均館司藝 兼司憲府掌令)으로 재직중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11월에 연경(燕京)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돌아왔는데 몸가짐이 바르고 사람을 접함에 엄연함으로 동행한 자가 심히 두려워 하며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동년 4월 상주목사(尙州收使)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니 간사한 관리들이 오히려 공을 무고(誣告)하여 마침내 관찰사(觀察使)의 징계(懲戒)로 파직, 곧 바로 이천 선영(利川 先塋)아래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고 한양(漢暘)의 왕래를 끊었다.
4년 戊午(1678) 여름, 울산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어 부임 즉시, 수년 끌어오던 원통한 송사(訟事)를 바로 처결하니 일경(一境)이 모두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후 지방의 토호(土豪)들이 관청을 속이고 횡포가 심하자 그 주모자 5.6인을 잡아 가두었는데 관찰사(觀察使)가 근읍(近邑)을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친히 국문(鞫問)코자 하였다. 공이 그 성미가 혹독함을 알고 본부(本府)에서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외딴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지하여 스스로 죄에 빠졌으니 징계로서 그침이 마땅하오."하니 관찰사(觀察使)가 드디어 허락하고 죄수(罪囚)들을 면대(面對)하여 이르기를 "너희 죄가 죽음에 마땅하나 너의 태수(太守)가 인자(仁慈)하여 너희들의 목숨을 상할까 염려하기 때문에 이미 허락하였으니 어진 사람 앞에 나아가 형을 받으라"하였다. 공께서 드디어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가장 악질적인 한놈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이외에도 오랫동안 미결한 송사(訟事)를 그 원인을 정확히 가려 신속 공정하게 처리하고, 백성들에게 폐가 되거나 부당한 일이면 즉시 처결하여 교화(敎化)가 크게 떨치니 관찰사(觀察使)와 어사(御吏)가공의 공적이 특이하다고 누차 계주(啓奏)하였다.
6년 庚申(1680) 여름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발령이 나니 고을에서 모두 모아 전송하고, 전일(前日)에 죄를 입은자도 도로에 까지 나와 말고삐를 붙들고 차마 이별을 아쉬워 하였다. 동년 12월 홍문관(弘文館)에 선임되어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이듬해 다시 수찬(修撚)에 제수되어 얼마 후 헌납(獻納)으로 전임하였는데 또 사임하고 이천(利川)으로 돌아왔다.
그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에 제수되어 몇달 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는데 곧바로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형조참의(刑曹參識)를 연거퍼 제수하되 다 부임하지 않았다.
8년 壬成(1682) 봄에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어 부임 초에 토호(土豪)로 신씨(申氏) 성 (姓)을 가진 자가 관찰사(觀察使)의 힘을 믿고 읍민(邑民)의 선산(先山)을 빼앗고자 송사(訟事)를 제기하였다. 공이 법에 의하여 물리치니 그가 오히려 쟁변(爭辯)하여 사기(辭氣)가 억세거늘 공이 드디어 옥에 가두었는데 관찰사가 노하여 꾸짖거늘 곧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 해 여름 영의정 김수항(領議政 金壽恒). 좌의정 민정중(左議政 闊鼎重)이 경연(經筵)에서 공의경학(經學) 과 이적(吏績) 및 청렴한 지조를 극히 칭송하니 왕이 특명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제수하고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으나 다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이때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가 이조참의(吏曹參讖)로 재직중 청렴한 관리 13인을 기용(起用)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중 공을 일러 학업이 정밀하고 굉박함을 칭찬하였다. 공이 마침 입경(入京)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가을에 또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제수되어 10년 甲子(1684) 봄에 파직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듬해 봄에 호군(護軍)으로 복직되었다. 이어 병조참의(兵曹參識) 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겨울에 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불리어 부임하였으나 구병(舊病)이 재발하여 12년 丙寅(1686) 6월에 사임하고 돌아와 동년 12월10일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였다.
공께서 여러 큰 고을을 다스렀지만 상사(喪事)에 쓸 기물(器物)이 없어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빌려다가 사후(死後) 6일만에 비로소 염습(殮聾)하고, 호남(湖南)에 있는 전당(田畓)을 매각 겨우 장수(葬需)를 갖추어 이듬해 2월 17일에 이천 송현 반계동(利川 松峴 懲溪洞) 선고(先考)묘소 아래 임좌(壬坐)에 장례를 모셨으니 이는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나고, 기모(氣貌)가 안상(安詳)하며 독서(讀書)를 즐겨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경전육예문(經傅六藝文)은 물론 염락관민(廉洛關問)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더욱 주역에 조예가 깊어 저술에 성능유의(成能遺義)일부가 있다. 그리고 문장(文章)을 지음에 이치(理致)가 달하고, 시짖기를 좋아하였으며 필법(筆法)이 단려(端麗)하였다.
공의 행장은 장암 정 호(丈巖 鄭 澔)가 짓고 비문은 지수재 유척기(知寺齋 兪拓達)가 지었다.
배위 남양홍씨(南繼洪氏)는 달호(達湖)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중형 진사 겸후(進士 謙厚)의 4자 주(疇)를 입계(入系)하였다.
※ 朝鮮王朝實錄. 行狀. 槿域書晝徵. 號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