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덕종(柳德種), 정랑공(正郞公), Ryu, Deok-Jong, 생몰년:1532-1613, 세:18
宣祖朝 文臣. 文肅公派. 자 언윤(彦潤). 호 정암(定庵).
예조참의 경조(禮曹參議 敬祖)의 손이요, 선교랑 영석(宣敎郎 永錫)의 2자로 중종(中宗) 27년 壬辰 3월12일 충주(忠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資質)이 총명하더니 7세에 사장(辭章)을 통하고 10세에 이미 경서(經書)는 물론 제책(製策)에 능하여 문명(文名)을 떨치었다.
17세 되던 명종(明宗) 3년 戊申(1548)에 부친과 조부의 상을 거듭 만나 애통한 나머지 거의 기절(氣絶)함에 이르렀는데 가인(家人)의 구호(救護)로 겨우 상을 마쳤다. 이로부터 가사(家事)를 돌보면서 백형 진사 선종(伯兄 進士 善種)으로 더불어 전에 배운 것을 서로 강습하며 학문에 열중하더니 선조(宣祖) 6년 癸酉(1573)에 진사에 급제하고 이어 12년 己卯(157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재직중 19년 丙戌(1586)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형조정랑(刑曹正郎)을 역임한 후 26년 癸巳(1593) 2월에 비변사(備邊司)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충주 백운산(忠州 白雲山) 밑에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면서 날마다 이른 아침에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고 제사는 한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쫓아 행하였다. 한편 원근의 생도들이 책을 짊어지고 와서 글을 배우고자 청함에 성의로써 대하여 귀천(貴賤)을 불구하고 재질에 따라 가르쳤다. 또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누차 상소(上疏)하고,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충주향교(忠州鄕校)가 화재를 당하였는데 공께서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통고하고 자금을 모아 목사(牧使)에게 청하여 향교를 중수(重修)하고, 유도(儒道)의 진흥에 힘쓰니 온 고을에서 감화하고 기꺼이 따랐다.
35년 壬寅(1602) 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이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부임하여 운곡(雲谷)에 강회(講會)를 배풀었는데 이때 공이 초빙되어 매월 강습하니 고을의 풍속이 크게 순화되었다.
공께서 문장(文章)이 능하여 많은 저술(著述)을 남겨 유고(遺稿)가 있으며, 광해군(光海君) 5년 癸丑에 향년 82세로 돌아 가셨다.
배위 청산김씨(靑山金氏)는 참봉 억지(參奉 億枝)의 따님으로 1녀를 두고, 여흥민씨(驪興閣氏)는 덕룡(德龍)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음성 솔예동 건좌(陰城 率禮洞 乾坐)에 합부하였으며, 공의 행장(行狀)은 도사 풍천임석호(都事 豊川任奭鎬)가 지었다.
장자 득신(得新)은 생원(生員)에 급제한 후 음사로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지냈고, 2자 정신(鼎新)과 3자 필신(必新) 은 광해군(光海君) 11년 己未(1619) 진사시(進士試)에 동방(間榜)으로 급제하였으며, 따님은 좌랑 여흥 민대(佐郞 驪興 閔濧)와 죽산 박기수(竹山 朴耆壽)에게 출가하였다.
후손은 충주(忠州). 이천(利川). 죽산(竹山).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朝鱗王朝實錄. 國朝榜目 . 行狀.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