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덕중 (柳德中)

류덕중(柳德中), 자인공(慈仁公), Ryu, Deok-Joong, 생몰년:1724-1780, 세:24.
英祖朝 文臣, 夏亭公派, 초명 덕신(德申), 자 의천(宜天).

안숙공 계문(安肅公 季聞)의 2자 종성부사(鐘城副使 䀯)의 9대손이요, 한성좌부윤 봉징(漢城府左尹 鳳徵)의 손이요, 봉화현감 하증(奉化縣監 夏曾)의 아들이며, 진사 전주이세성(進士 全州李世晟)의 외손으로 경종(景宗) 4년 甲辰에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영조(英祖) 29년 癸酉(1753)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그 후 음사(蔭仕)로 여러 관직을 거쳐 양천현감(陽川縣監)에 이르렸다.
37년 辛巳(1761) 6월, 주상께서 경현당(景賢堂)에 납시어 조강(朝講)을 마치고 경기도(京畿道)의 수령(守令)들을 불러 보시고 우량(雨量)의 다소를 물으신 후, 양천현감 류덕중(陽川縣監 柳德中)에게 상현궁(上弦弓)을 하사(下賜)하시고 이르시기를 『저번에 어사(御使)의 계주를 들으니 그대가 성의를 다하여 백성을 다스린다하니 내 심히 가싱히 여기노라』하시었다.
43년 丁亥(1767) 정월에 주상께서 경현당(景賢堂)에 납시어 유생(儒生)들에게 인일제(人日製)를 시험하셨는데, 이때에 거수생원 류덕중(居首生員 柳德中)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것을 명하시었다.
이듬해 戊子(176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제이인(甲科第二人)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대교(待敎)에 승진하더니 후에 자인현감(慈仁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친우가 사직(辭職)을 말림에 공께서 말하기를 『내가 출사(出仕)한건 본디 원하는 바 아니었는데 지금 세도(世道)가 날로 어지러워 신의와 정직이 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하고 호연히 돌아와 광주(廣州)에서 살다가 향년 57세로 졸하니 정조(正祖) 4년 更子 4월 29일이었다.
배위 의령남씨(宜寧南氏)는 현감 원명(縣監 遠明)의 따님으로 1남을 두어 재동(在東)인데 진사(進士)이다.
공의 묘소는 양주 풍양 괘라리 형제암 선영하 간좌(楊州 豊壤 掛羅里 兄弟岩 先塋下 艮坐)에 모셔 있고, 배위 묘소는 율엄현 갑좌(栗崦峴 甲坐)에 모셔있다.

※朝鮮王朝實錄, 在澗集.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