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덕룡(柳德龍), 초료당공(鷦鷯堂公), Ryu, Deok-Ryong, 생몰년:1563-1644, 세:21
仁祖朝 學行 左相公派, 자 시현(時見) 호 초료당(鶴鷯堂).
증좌찬성 종(贈左贊成 淙)의 4자 중군사정 사문(中軍司正 思問)의 5대손이요, 부장 홍(部將 洪)의 2자로 명종(明宗) 18년 癸亥에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는데 5세에 육갑(六甲)을 외우고 수(數)를 헤아릴줄 알더니 7세에 책을 가지고 배움을 청하여 글을 읽었다.
남명 조 식(南冥 曺 植) 선생이 그 소문을 듣고 불러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높으니 가히 가르칠만한 아이다"하고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선생께서 임종(臨終)에 각재 하항(覺齋 河 抗)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성취하리니 잘 인도하여 우리 고을의 안자(顔子)를 만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각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각재께서 그 뜻과 행실을 보고 사랑하던 나머지 마침내 사위를 삼았다.
모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심에 몸소 약과 미음을 다리고 밤낮으로 분뇨(糞尿)를 맛보며 하늘에 정성껏 병환의 쾌유를 빌더니 문득 상(喪)을 당함에 모든 절차를 가례(家禮)에 쫓아 행하였다.
부인 하씨(河氏)가 우귀(于歸)전에 죽게 되어 임종(臨終)시에 한번 보고 영결(永訣)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죽어서는 가히 조문(弔問)할지언정 살아서는 가히 면대(面對)하지 못하겠다. "하고 적삼 한벌을 보내어 염습(殮聾)토록 하였으니 그 집례(執禮)의 엄정함이 이와 같았다.
壬辰에 왜적(倭賊)이 쳐들어와 부친께서 적에게 사로 잡혔는데 공이 두 누이로 더불어 칼날을 무릅쓰고 부친을 호위하다가 경계가 조금 소홀한 틈을 타서 부친을 등에 업고 도망하여 구원하였다. 그 후 난리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버이 공양에 지성을 다하고 드디어 부친의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다함은 물론 매일 성묘(省墓)하되 혹심한 추위와 더위에도 하루도 폐하지 않았다.
난리가 끝난 후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여 현달(顯達)을 구하지 않고, 만년에 삼가 토동(三嘉 兎洞)으로 이거하여 북산정(北山亭)을 짓고, 장수지소(藏修之所)를 삼으니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많이 모여들어 시부(詩賦)로서 소일하며 초료당(鷦鷯堂)이라 자호하고 이곳에서 여년을 마치니 때는 인조(仁祖) 22년 甲申 정월 18일로 향년 82세였다.
정자(亨子) 뒷산 손좌(巽坐)에 장례를 모셨는데 죽곡 정 흔(竹谷 鄭 昕)이 만사(挽辭)를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배위 진주하씨(晋州河氏)는 바로 각재 항(覺齋 沆)의 따님인데 무육 조졸하고,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진사 사렴(進士 士廉)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어 아들은 영한(暎漢)이요, 사위는 허 익(許 釴)과 조홍기(趙弘起)이다.
성산이여정(星山李如珵)이 공의 행장을 짓고, 풍산 류주목(豐山柳疇睦)이 공의 묘갈명(墓碣錦)을 지었다.
사림(士林)들이 공의 학행(學行)을 기리어 삼가(三嘉)에 북산사(北山祠)를 건립, 공을 향사하다가 지난 甲子(1984)에 사우(祠宇)를 중건하였다.
※ 三壽邑誌. 陜川郡誌. 墓碣銘.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