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덕신 (柳德新)

류덕신(柳德新), 도정공(都正公), Ryu, Deok-Sin, 생몰년:1548-1617, 세:20
光海朝 蔭仕, 中門祇候使公派, 자 경언(敬彦)

중랑장 중의(中郞將 仲宜)의 6대손이요, 공조판서 잠(工曹判書 潛)의 2자로 명종(宣祖) 3년 戊申에 태어났다.
음사로 선조(宣祖) 32년 己亥(1599)에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내고 이어 온양군수(溫陽郡守)를 거쳐 28년 乙巳(1605) 10월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에 제수되고 이듬해 8월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갔다.
광해군(光海君) 4년 壬子(1612) 윤 11월에 왕의 전교(傳敎)에 이르기를 <중화부사 류덕신(中和府使 柳德新)은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의 아우로서 이미 삼품(三品)의 실직을 지냈고, 문양부원군(祗候使公派)이 참훈일등(參勳一等)하여 자제들이 또한 포상(褒賞)을 받았으니 류덕신(柳德新)에게 가자(加資)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하노라>하였다. 이로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니 삼사(三司)에서 불가하다는 건의가 있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그 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8년 丙辰(1616) 정월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어 돌아가시니 향년 70세로 안산 목실리(安山 木實里)의 부친 판서공(判書公)묘소 계하에 묻히시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공께서 항상 사문(私門)의 성만(盛滿)함을 두렵게 여기고,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과거를 보지 말라>하시었다. 이로써 아들들이 유지(遺志)를 받들어 과거를 치르지 않고 음사(蔭仕)로 그치었다.
배위 당진한씨(唐津韓氏)는 의(誼)의 따님이요, 대사헌 간이당 한 숙(大司憲 簡易堂 韓 淑)의 손녀인데 일찍 돌아가시자 공의 묘소에 합부하였고, 경주최씨(慶州崔氏)는 판관 열(判官 悅)의 따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온 성중(城中)이 혼란한 지경에 부인께서 서실(書室)에 들어가 통감(通鑑) 한권을 싸가지고 나와 날리 속에서도 여러 아들들을 가르쳐 그 후 문한(文翰)이 그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부인의 쌓은 덕행 때문이다.>하였다. 부인께서 101세의 고령(高齡)을 누리시고 돌아가시니 공의 묘소 계하(階下)에 모셨다.
아들에 희성(希成)은 첨지(僉知)요, 희로(希老)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요, 희설(希설)은 현감(縣監)이요, 희익(希益)은 첨정(僉正)이며, 사위는 종실(宗室) 금산군 이성윤(錦山郡 李誠胤). 평안감사 반남박 엽(平安監司 潘南朴 燁). 부사 이대득(府使 李大得). 도정 양의(都正 梁의). 감역 언양김 석(監役 彦陽金 晳)이며 서자(庶子)에 희연(希衍)과 희윤(希尹)이 있었다.
후손이 명주군 왕산면 도마리(溟州君 旺山面 都麻里).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丹陽郡 永春面 龍津里). 시흥군 수암면 목감리(始興郡 秀岩面 牧甘里). 논곡리(論谷里).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楊平郡 丹月面 山陰里). 화성군 마도면 해문리(華城郡 麻道面 海門里). 평택군 현덕면 화양리(平澤郡 玄德面 華陽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世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