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덕용(柳德容), 열역재공(悅易齋公), Ryu, Deok-Yong, 생몰년:1536~1628, 세:18.
宣祖朝 孝行, 檢漢城公派, 자 중부(仲符), 호 열역재(悅易齋).
효자정려(孝子旌閭), 병조참의 추증(兵曹參議追贈)
열역재 행적(附悅易齋行蹟)공의 손 부사 응양 찬(公之孫府使應良撰)
공의 휘(諱)는 덕용(德容) 자(字)는 중부(仲父) 열역재(悅易齋)는 그의 호(號)다. 문화류씨(文化柳氏)로 정묵재(靜黙齋) 휘(諱) 선(善)의 현손(玄孫)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 효진(孝眞)의 증손(曾孫)이며, 수찬(修撰) 휘(諱) 옹(澭)의 손자이고, 교리(校理) 휘(諱) 수언(秀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군수(郡守) 상로(商老)의 딸인데, 본시 규방의 범절이 드러나게 예의와 법도를 잘 닦았다. 공(公)은 높은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특별히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의 뜻을 지켜서 기개와 도량이 견고하고 확실하며, 지조와 절의가 빛나고 단단하였다. 어린 시절에 역사서를 읽다가 문득 그 사람의 현부(賢否)와 행사(行事)의 득실을 논하였는데 충성스럽고 어질거나, 무고를 입거나, 아첨하여 남을 참소하거나, 뜻을 얻거나 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여 마치 장차 질타하거나 기뻐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니, 이는 확실히 충의의 본성이어서 배우지 않고도 그러했던 사람이다.
장년에 이르러 과거시험을 일삼지 아니하고 성리(性理)에 마음을 오롯이 하니, 위로는 수사지학(洙泗之學)의 연원(淵源)에, 아래로는 염민(濂閩)의 적전(嫡傳)에 이르기까지 그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도 마음을 다해서 이치에 맞게 하고, 유문(遺文)과 방책(方冊)을 모두 스스로 미세하게 분석하고 환하게 비춰보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 유학(儒學)의 종장(宗匠)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 집을 상설(常設)하여, 강구(講究)하고 연마(鍊磨)하는 장소로 삼아서 그 당(堂)을 수제헌(修齊軒)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후진과 더불어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의리(義理)를 갈고 파헤쳐서 이로써 당시 학자들이 때때로 ‘우리 선생님’이라고 일컬은 것은 대개 공(公)을 가리킨 것이다. 더욱이 주역(周易)에 힘써서 능히 은미한 이치를 열고 심오한 뜻을 탐색(探賾)하여, 부자(夫子)께서 만년에 좋아하신 이(理)를 기뻐하며, 앞선 성인들의 깊은 뜻을 펴서 후학들을 이끌어 가르쳤으므로 이로 인하여 ‘열역(悅易)’으로 호를 하였다.
또 천성이 순효(純孝)하여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비록 늘그막에 이르렀지만 어린애로 자처하고, 무릇 모든 공양의 절차를 오로지 힘써 보여주었는데, 약을 드리는 봉양에는 반드시 먼저 맛보고, 색양(色養)과 충양(忠養) 같은 태도는 공(公)의 평소에 하는 행동이요, 소략한 예절에 지나지 않아서 공(公)의 지극한 행동을 일컫기에는 부족하였다.
일찍이 어버이[親]의 환후가 심하여 모든 약이 효험이 없었는데 의원이 “연꽃을 약에 타서 쓸 것 같으면 반드시 효험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때가 겨울철이라 못 가득 쓸쓸하고 고요했는데, 묵은 줄기는 시들고 비틀어져서 얻을 희망이 전혀 없어 울면서 하늘에 기도하고, 몸을 떨치고 물에 나아가 마음 급하게 사방을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한 줄기 꽃이 못 가운데서 나와서 곧 취하여 약에 타 드리니 어버이 병이 바로 나았다. 그때 도백(道伯)이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양덕현감(陽德縣監)에 제수되고, 이로 인해서 살아 있는 효자로 정려를 받았으며, 그 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공(公)은 한양에서 대대로 살았고, 참봉(參奉) 휘(諱) 문옥(文沃)의 아들인데 교리공(校理公)에게 출계(出繼)하였다. 서울에서 전주(全州) 및 김제(金堤) 백구정(白鷗亭)에 옮겨 우거하였는데 이로 인해 머물러 살 만한 곳을 화순(和順)에 정하였다.
숭정(崇禎) 무진(戊辰, 1628, 인조 6)년 7월 28일 향년 93세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현감(縣監) 이(洢)의 딸이다. 부덕을 겸비하여 집을 다스리는 법도가 있으며 3남 6녀를 두었다. 맏이는 홍(泓)으로 임진(壬辰, 1592)년 섬 오랑캐들의 난에 백의로 종사하여 순절하니 평양에 사우(祠宇)가 세워지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제(濟)로 첨지(僉知)이고, 막내는 함(涵)으로 갑자(甲子, 1624)년에 의병을 모으고, 병자(丙子, 1636)년에는 의병을 창의하였다. 딸은 박사건(朴士健) 참봉(參奉), 한효삼(韓孝參), 한효연(韓孝淵), 이덕무(李德懋), 김시성(金時省) 참봉(參奉)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최서생(崔瑞生)에게 시집갔는데 정유(丁酉, 1597)년 난(亂)에 사진포(沙津浦)에서 열사(烈死)하였고, 사적(事績)이 알려져서 정려가 세워졌다.
함(涵)은 5남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지성(之性), 다음은 지기(之起), 지서(之瑞), 지화(之和), 지혜(之惠)이고, 이덕무(李德懋)의 아들은 이거진(李居震), 김시성의 아들은 김상립(金尙立) 참봉(參奉), 최서생(崔瑞生)의 아들은 최기종(崔起宗) 현감(縣監), 내외(內外) 증․현손(曾 ․玄孫)이 모두 약간 명이 있다.
아, 공(公)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은 후손들의 모범이 될 만하고 유학의 의칙(儀則)이 되었으나, 다만 여러 차례 회록(回祿)의 재앙을 받은 나머지 문헌의 징험이 없다. 지금 기록한 것은 다른 집에 글상자 속에서 찾아 등사(謄寫)한 것이지만, 지극한 행실의 만분의 일도 얻지 못했으니 아, 슬프다.
부자(父子)의 행실이 대략 해동삼강록(海東三綱錄)에 들어 있으니, 또한 대인군자(大人君子)에게는 징험으로 믿는데 족할 것이라고 집필자는 운운할 따름이다.
순조(純祖) 신사(辛巳)년에 도내(道內) 사림(士林)은 공(公)을 정묵재(靜默齋) 언동(彦洞) 사우(祠宇)에 배향하였다.
춘추정향문(春秋丁香文)
행실의 근원과 이의 뿌리가 行源理柢
공에게 겸하여 있으니 於公兼有
복은 다 먹지 못해도 福不盡食
영원히 남아서 이어가리 永以遺繼
판서 이가우 찬(判書李嘉愚撰)
-백천유집(百泉遺集)-
[입력: ryuj 0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