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득공(柳得恭), 영재공(冷齋公), Ryu, Deuk-Gong, 생몰년:1748~1807, 세:28
正祖朝 實學者, 中門祇候使公派, 자 혜보(惠甫). 호 냉재(冷齋).
문양부원군 자신(文陽府院君 自新)의 2자 판결사 희당(判決事 希聃)의 7대손이요, 규원 춘(養園瑃)의 아들로 영조(英祖) 24년 戊辰 11월 5일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로 이름이 있더니 일찌기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을 스승으로 섬기고 실학(寶學)을 전공하여 실사구시(寶事求是)를 힘쓰는 동시에 시부(詩賦)에 있어서는 구격(舊格)을 벗어나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50년 甲午(1774)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정조(正祖) 3년 己亥(1779)에 음사(蔭仕)로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에 선발되었다. 그로부터 외직으로 포천(抱川) , 제천(堤川)의 현감을 거쳐 양근군수(楊根郡守)를 지냈는데 항상 검서(檢書)의 직책을 경임하였으며 만년에 풍천부사(豊川府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薺家) , 서이수(徐理修)로 더불어 당시 사검서(四檢書)로 일컬었다. 공의 저술인 발해고(渤海考)는 역사서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경도잡지(京都雜誌)는 당시 사회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밖에 냉재집(冷齋集)과 수편의 유필(遺筆)이 전하고 있으며, 특히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部懷古詩)는 널리 중국(中國)에까지 알려진 명저(名著)이다.
순조(純祖) 7년 丁卯 9월 1일 돌아가시니 향년 60이었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채휘(采徽)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양주 외송산 곤제동(楊州 外松山 昆弟洞). 지금 의정부시 낙양동(議政府市 洛陽洞) 선영, 감찰공 승조(監察公 承祖)의 묘좌(卵坐)에 고위(考位)와 합폄으로 모셔 있다.
장자 본학(本學)은 연천현감(連川縣監)을 지내고, 차자 본예(本藝)는 순조 27년 丁亥(1827)에 경서관(檢書官)으로 일성록(日省錄)의 범례(凡例)를 짓고, 이어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냈는데, 형을 능히 이어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일세에 명망이 높았다. 따님은 의령남준도(宜寧南駿圖)와 창녕성익증(昌寧成翼增)에게 출가하였다.
후손은 평택군 팽성읍 남산리 , 중원군 소태면 덕은리 ,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 대전시 , 서울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 丙寅譜, 人洶誌, 圍書解題,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