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도(柳棹), 반곡공(盤谷公), Ryu, Do, 생몰년:1604-1663, 세:21
仁祖朝 學行. 檢漢城公派, 자 용제(用濟). 호 반곡(盤谷)
창평현령 효중(暠平縣令 孝申)의 6대손이요, 수곡태형(樹谷 泰亨)의 3자로 선조(宣祖)37년 6월23일에 김제 수곡(金堤 樹谷)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품을 타고나 가정 교훈을 독실히 익혀 학문이 숙성하더니 장성함에 백형 백석 집(白石 楫)을 따라 사계 김장생(沙淺 金長生) 선생의 문하에 출입, 성리학(性理學)을 힘써 배웠다.
인조(仁祖) 11년 癸酉(1633)에 친명(親命)으로 과거에 응시 생원(生員) 급제하였다.
14년 酉子(1636)에 후금(後金)의 오랑캐들이 물밀듯 쳐들어와 도성(都城)을 함락하고 마침내 주상께서 몽진(蒙塵)하기에 이르자 의분(義憤)에 강개한 나머지 백형(伯見)과 함께 창의(湯義) 여러고을에 다음과 같은 격문(檄文)을 전하였다. "국가의 위급함이 이 같은데 신하와 백성된 자로 자기 몸을 아끼고 나라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의 수백년 동안 선비를 양성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드디어 의병(義兵)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의병장 이흥발(義兵將 李與涍)의 진에 가담하여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끝에 돌아와 군량 백여석을 병영(兵營)에 반납하였다. 일은 비록 성취하지 못했으나 식자(識者)들은 그 절의를 위대하게 여기었다. 20년 壬午(1642)에 부친 상을, 효종(孝宗) 8년 丁酉(1657)에 모친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에 쫓아 복(服)끊을 마치고 현종(顯宗) 원년 庚子(1660)에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3년 壬寅(1662)에 다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겨울 서울에 올라도중 병을 얻어 여사(旅含)에서 돌아가시니 현종(顯宗) 4년 癸卯 10월14일로 향년 60이었다. 금구 황산 병좌(金溝 鳳山 丙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공은 소시(少時)로 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만년에 이르러 더욱 수양에 열중하더니 품행이 순수하고 지조가 확연하여 비록 홀로 한가히 있을 때라도 반드시 정신을 가다들어 정좌(整坐)하고 태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부귀와 영화에 일체 담박하였다. 그리고 나물 밥과 헤진 옷을 입을지라도 처신이 항상 태연하였으며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어버이 생전에 봉양함과 사후(死後)의 치상(治喪)에 성의와 예절이 조금도 결함이 없었다.
모친께서 노령(老齡)에 병이 잦았는데 공이 주야로 곁에서 모시면서 시종 게으름이 없었고 탕약(湯藥)과 미음 등을 반드시 몸소 맛본 후에 드리고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았으며 전후로 거상(居喪)에 한결 주자가례(朱子家福)를 쫓아 행하였다. 특히 모친 상에는 공의 나이 50이 님었었는데 모든 절차를 예에 쫓아 어김이 없으니 고을에서 감복하여 본받는 자가 많았었다.
곤궁한 이를 도와 구제하는데 항상 미치지 못한것 같이 하더니 일찌기 여산(礪山)을 지나던 길에 선빈 한 사람이 객지에서 부모 상을 당하여 돈이 없어 반장(返葬)을 못하고 길가에서 울고 잇었다. 공이 이 사실을 알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전답(田畓)을 매각하여 수백량을 주어 반장케 하였는데 원근에서 그 의리를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백가 제서(百家 諸書)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더욱 예학(禮學)에 정밀하고 문장이 간결하여 세상에 회자(膾炙)되었다. 시남 유계(市南 兪棨). 기암정홍명(崎庵 鄭弘漠). 용서 윤원거(龍西 尹元擧). 봉곡 김동준 (鳳谷 金東準)등과 종유(從遊)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외우(畏友)로 추중하였다.
배위 김제조씨(金堤趙氏)는 진사 응식(應埴)의 따님으로 정숙한 부덕(婦德)이 있었고,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 백영(伯榮)은 백부 백석공(白石公)의 후로 출제하고, 2자는 중영(仲榮)이요, 3자는 계영(季榮)이며, 따님은 김상직(金相程)에게 출가하였다. 서자에 희영(希榮)과 필영(必榮)이 있었다.
공의 묘갈명은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丸)가 짓고, 행장은 약재 송병화(約齋 宋炳華)가 지었다.
지난 乙卯(1915) 2월에 양호(兩湖)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으로 백석사(白石祠)에 공이 추배(追配)되었다. 동년 3월에 유고(遺稿)가 간행되었는데 서문은 사과 연안 이원(司果 延安 李傆)이 지었다.
공의 후손은 김제군 백산면 승반리(金堤郡 白山面 勝慤里)에 세거하고 있다.
※ 墓碼銘. 白石祠誌.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