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도(柳燾), 도정공(都正公), Ryu, Do, 생몰년:1807-1894, 세:29
高宗朝 行誼, 貞肅公派, 초회 병옥(炳鈺). 자 경보(景普). 호 류산(柳山).
황해관찰사 장(黃海觀察使 車)의 I5대손 이요, 증호조참판 최영(贈戶曹參判 最榮)의 장자로 순조(純祖) 7년 T卯 6월 1일 무주(茂朱)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이미 속문(屬文)에 능하여 일방에 이름이 높더니 헌종(憲宗) 6년 庚子(1840)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그 후 음보(蔭補)로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을 거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일찍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의 문하에 집지(執勢)하였는데 선생께서 칭찬하여 이르기를 『천품이 단정 결백하고 도리를 구함에 절실하도다.』하고, 공께서 돌아오심에 또 증시(贈詩)하여 이르기를 『천만사람 가운데도 자신을 알고, 나의 말을 깊이 새겨 마음의 참됨을 볼 것이요, 세상의 명리는 모두 헛된 속임 이니 시골로 돌아가 몸을 보전할 지어다.』하였다. 공이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의복 등을 심력을 다하여 갖추어 드리고, 막상 친상(親喪)을 당함에 초종(初終)과 상담(祥橝)의 범절을 한결 예제에 쫒아 행하고 3년을 여묘하여 조석으로 곡배(哭拜)하니 묘정(墓庭)에 무릎 끊은 자리가 지금까지 흔적이 있다고 하며, 매양 기신(忌辰)을 당함에 80세가 넘도록 몸소 참례하여 지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고 형제간에 우애 또한 깊었다.
선조 정숙공(貞肅公)의 묘갈명을 심암 조두순(心庵 趙斗淳)에게 받고, 공조판서 신관호(工曹判書 申觀浩)에게 글씨를 받아 고종(高宗) 원년 甲子(1864)에 족숙 기영(族叔 基榮)과 함께 묘비를 개수하였다.
24년 T亥(1887) 정월 28일 의정부(議政府)에서 계주(啓奏)하기를 전라좌도 암행어사 이만교(全羅左道 暗行御史 李萬敎)가 올린 별단(別單)을 보니 그 가운데, 『무주(茂朱)에 사는 전동돈령 류 도(前同敦寧 柳 燾)가 행의가 훌륭하므로 간략히 추장(推獎)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청하였사오니, 해조(該曹)에 명하시어 품처(稟處)토록 하여 시행하심이 마땅할줄 압니다.』하니 주상께서 그 효행과 학문을 아름다이여 기시고 윤허 하시었다.
선세의 효열(孝烈)을 포상(褒賞)해 줄것을 조정(朝延)에 누차 청하여 증직(贈職)과 정려(旌闇)의 은전을 무릅썼으며, 만년에 거처하는 집 뒤에 사류정(四柳亭)을 지어 날마다 사우(士友)로 더불어 그곳에 소요하면서 시율(詩律)을 즐기다가 31년 甲牛 7월 6일 졸하니 향년 88세로서, 묘소는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후강 임좌(錦山郡 濟原面 濟原里 後同 壬坐)에 모셔 석의(石儀)를 갖추었다. 대사성 정은조(大司成 鄭誾朝)가 묘갈명을 짓고 판돈령 윤용구(判敦寧 尹用求)가 비문을 썼으며, 공의 유고(遺碻)가 있다.
배위 청주곽씨(淸州郭氏)는 상하(相夏)의 따님이요,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의구(義龜)의 따님이다.
5남 1녀를 두어 장자 봉증(鳳增)은 족숙 병규(族叔 炳奎) 후로 출계하고, 다음은 학증(鶴增) ,흥 증(鴻增) ,붕증(鵬增) , 완증(완增)이며, 따님은 남원양덕환(南原努똔謎奐)에 게 출가하였다.
공의 계제 휴(季弟 烋)는 생원(生員)이요, 종형 훈(從免 勳)은 진사(進士)이며, 아들 손자에 4인이 사마시 (司馬試)에 급제, 일문에 칠사마(七司馬)가 났고, 그외 내외 관직(內外官職)을 지낸이가 많아 당대에 호남명문(湖南名門)으로 일컫었다.
출계한 봉증(鳳增)은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효행이 지극하더니 친환(親患)에 약탕(藥湯)을 스스로 다리고 주야로 띠를 풀지 않았으며, 부친의 서적을 비록 조그마한 문자라도 반드시 공경하여 이르기를『어른의 손때가 묻었으니 함부로 해선 안된다.』하였다. 일찍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선생께서 원대한 인물로 기대하였으며 헌종(憲宗) 14년 戊申(1848)에 계부 휴(季父 烋)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동방(同榜)으로 급제하고 수년 후 불행히 졸하니 겨우 27세였다. 고종(高宗) 17년 庚辰(1880)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고 3년 후 癸未(1883)에 아우 홍증(鴻增)과 함께 정려 (旅閭)의 은전이 내려졌다.
학증(鶴增)은 행의가 뛰어나 고종(高宗) 14년 T丑(1877) 2월 의정부(議政府)의 계주(啓奏)로 포상(褒賞)을 받았으니 아래와 같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계주(啓奏)하여 이르기를 전라감사 이돈상(全羅監司 李敦相)의 장궤(狀啓)를 보니 무주 사인 류학증(茂朱士人 柳鶴增)은 작년 가을 이래로 배를 주리는 백성에게 양식을 주고, 얻어 먹는 거지에게 죽을 쑤어 주고, 또 벼 일천석을 내어 진휼(賑恤)할 식량을 대었으니 포상(褒賞)의 특전을 내리도록 품처(稟處)를 청합니다 고하였읍니다. 아뢰옵건대 양식을 대어 구제하고 죽을 쑤어 구원하였으니 이미 대단한 성력이 드러났는데, 하물며 또 일천석의 곡식을 자진 헌납하여 도왔으니 더욱 가상한 일입니다.
해당 관서(官署)에 명(命)하사 상당한 벼슬을 내리시어 조가(朝家)에서 포상(褒賞)하는 뜻을 보이심이 어떠할는지요.』하니 주상께서 윤허 하시였다. 이로써 내직(內職)에 발탁되었다가 얼마 후 장수현감(長水縣監)을 지내고 25년 戊子(1888)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10여년을 서울에 있으면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당하여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오직 관직을 지켜 태연 자약하니 당시 사람들이 『직분을 다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얼마 후 고향으로 돌아와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瑢) 선생을 뵈오니 선생이 종유(從遊)로써 추중하였다.
홍증(鴻增)은 효성이 출중하여 몸소 산에 가서 나물 캐고 물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 반찬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일찍 말하기를 학자는 사람된 도리를 배워야 한다. 하고, 다른 책은 보지 않고 소하(小學)을 읽었다. 때로는 조용히 앉아 사색(思索)에 골몰하고 행사(行事)에 혹 잘못됨이 있으면 반드시 뉘우치고 고쳐 의리 (義理)를 행하였다. 하루는 병환이 침중(沈重)하여 그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 이르기를 『나의 병이 이미 위독하오, 그러나 그대가 있으니 구고(舅姑)를 잘 섬기고 조카 아이를 잘 길러 나의 후사(后鬪)로 삼으면 어찌 평일에 배필(配匹)간에 지증한 의리(義理)가 아니겠소?』하고 돌아가셨다.
이로부터 한씨(韓氏)가 부군의 유교(遺敎)를 능히 쫒아 가도(家道)를 갱신하고 종신토록 효열(孝烈)의 도리를 견지함으로 향당에서 칭찬하고 여러차례 천장(薦狀)이 있었다. 고종(高宗) 16년 己卯(1879)에 효행으로 공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이 내리고 20년 癸未(1883)에 형 봉증(鳳增)과 함께 동일에 정려(旌閭)의 특전이 내린다.
붕증(鵬增)은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의 문인으로 고종(高宗) 20년 癸未(1883)에 음사로 선공감가감역 (繕工監假監役)을 지내고, 31년 甲午(1894)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부친께서 80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반드시 곁에서 모시고 만약 환후(患候)가 계시면 간호에 지성을 다하였으며, 자기가 혹 몸이 아플지라도 어버이에게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 입으로 아픈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친상(親喪)에 예제(禮制)를 다하여 상기(喪期)를 마친후, 금산 제원(錦山濟原)에 산소 자리를 구하고, 비갈(碑碣)은 남포(藍浦)의 돌을 써서 庚申(1920)에 수비(竪碑)하였으며 또 부친의 유고(遺稿)를 수집 간행하였다.
한편 형제간에 일실에 거처하며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누차 도천(道薦)에 올랐으며, 사적이 풍화록(風化錄)에 실리었다.
완증(緩增)은 형들을 쫒아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문하에 수업하고 고종(高宗) 22년 乙酉(1885)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자손들이 무주군 적상면 삼류리(茂朱郡 赤裳面 三柳里)에 세거하였다.
※ 追先錄, 高宗寶錄, 丙寅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