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룡 (柳應龍)

류응룡(柳應龍), 문원군(文原君), Ryu, Eung-Ryong, 생몰년:1463-1539, 세:18
中宗朝 功臣. 左相公派,자 자운(子雲)

영의정(領識政) 노포당 순(老圃堂 洵)의 장자로 세조(世祖) 9년 癸未 2월에 양주(楊州)에서 태어났다.
덕성과 도량이 출중하여 약관(弱冠)이 못되어 이미 성인(成人)과 같았고 한편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성종(成宗) 14년 癸卯(1483)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20년 己酉(1489)에 문음으로 사직참봉(社稷參奉)이 되고, 이어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 , 직장(直長)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 형조좌랑(形曹左郞)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7년 辛酉(1501) 11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으며 그 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종친부전첨(宗親府典鑛).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군기시정(軍器寺正). 병조참의(兵曹參議)를 두루 거쳐 丙寅(1506) 7월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하였다.
동년 9월 부친과 함께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므로써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중종(中宗) 2년 丁卯(1507) 2월 문원군(文原君)에 봉해졌다. 동년에 모친 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마치고 다시 이조참판(吏曹參釗)에 복직되었으나 얼마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께서 시례(詩禮)의 가문에서 생장하여 일찌기 가정교훈을 독실히 익히더니 덕기(德器)가 안으로 충실하고 의표(儀表)가 밖으로 드러났으며 훌륭한 풍채와 백설(白雪)같은 수염이 그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바라보고 자연히 공경하여 마지 않았다. 그리고 노년(老年)에 이르러서도 정신이 오히려 밝아 번거로운 일에도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일찌기 정현왕후(貞顯王后)께서 돌아가셨을 때 공께서 도감제조(都監提調)로서 양례(襄禮)를 치렀는데 오직 고례(古禮)를 준수하여 정밀하고 민첩하게 처리하므로 관리들이 모두 우러러 감탄하였다.
무릇 조정에 있을 때 문사(文士)들과 시문을 서로 수창(酬唱)함에 공의 민첩함을 모두 감복하였다.
34년 己亥 12월 12일에 양주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7세로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리고 이듬해 고을 동쪽 무둔산(無屯山)아래 팔야리(八夜里)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공의 묘표는 대제학(大提學) 돈재 성세창(遯齋 成世昌)이 지었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암성수 륜(巖城守 綸)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으니 장자 경원(敬元)은 경력(經歷)을 지냈는데 무후(無后)하고, 차차 경장(敬長)은 성종(成宗) 23년 壬子(1492) 5월 18일 양주(楊州)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개가 뛰어났으며 행실이 자상하고 근엄하였다. 중종(中宗) 11년 丙子(1516)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9년 甲申(1524)에 음사(蔭仕)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보직되고 그 후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을 거쳐 삼화(三和) 영평현령(永平縣令).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서윤(庶尹)을 지낸 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드러났었다. 나이 60세에 이르러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에 물러나 있던중 명종(明宗) 18년 癸亥(1563)에 공신(功臣)의 적장손(嫡長孫)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22년 丁卯(1567) 8월 7일에 졸하니 향년 76세로 지금 양주군 진접면 팔야리 무둔산 선영하 자좌(楊州郡 榛接面 八夜里 無屯山 先塋下 子坐)에 모셔졌다.
묘지명은 홍문관부응교 이담(弘文館副應敎 李湛)이 짓고 묘갈명은 영의정 홍섬(領議政 洪暹)이 지었다.
※朝鮮王朝實錄. 墓表. 墓碣銘.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