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일 (柳基一)

류기일(柳基一), 용서공(龍西公), Ryu, Gi-Il, 생몰년:1845-1904, 세:30
高宗朝 懦學者. 左相公派, 자 성존(聖存). 호 용서(龍西).

영의정 우복당 전(領識政 愚伏堂 畑)의 11대손이요. 문녕군 향하 병철(文寧君 香下秉喆)의 2자로 헌종(憲宗) 11년 乙巳 6월 3일 지금 포천군소흘면고모리(抱川郡蘇屹面古毛里)에서 태어났다.
자품(資稟)이 뛰어나게 영특하고, 지기(志氣)가 남달리 고상하여 일찌기 과업(科業)에 뜻을 두지 않고 구도(求道)에 전념하였다. 화서 이항노(華西李恒老) , 중암 김평묵(重庵 金平黙)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성리(性理)의 학문을 체득하여 행의가 독실하고 문장이 탁월함으로 동문은 물론 유림(儒林)에서 종사(宗師)로 숭앙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나 어버이를 섬김에 지체의 봉양을 다하고, 친상(親喪)에 여묘(廬墓)로서 종제(終制)하여 얼굴이 검고 뼈만 남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한편 형제 자매로 더불어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다.
고종(高宗) 甲牛 , 乙未년간에 왜적(倭賊)의 발호로 드디어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국모(國母)를 위하여 복상(服喪)하고, 한편 단발령(斷髮令)등 갖가지 시폐가 속출함으로 동문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으로 더불어 항소(抗訴)를 올려 그 부당함을 극구 간하였다. 이어 양풍(洋風)이 쇄도하고 이단(異端)이 성행하여 국가의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인륜이 날로 그릇쳐 감으로 이를 통분한 나머지 척양록(斥洋錄)과 주자변증록(朱紫辨證錄)을 지어 회유(誨諭)하고, 또한 사도(斯道)를 홍기시킬 것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고 고향 향적산 밑에 은거하여 후생교육에 전념하였다. 이에 원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아들어 학문을 성취한분이 많았는데 그 중에 지재 이철영(持齎 李哲榮) , 황재 나상협(黃齎 羅相協) 등이 그 고제(高弟)이다.
위선(爲先)의 성의가 독실하여 분묘를 실전한 선조(先祖)의 지방(紙榜)을 집에 모시고 매년 9월 그믐날 향사하기 24년 만에 지금 포천군신북면계류리(泡川郡新北面溪流里) 선영 곁에 설단(設檀)하였으니 지금 류씨오대단(柳氏五代壇)이 바로 그 시초이다.
선현(先賢)을 경모함이 지극하여 일찌기 공자(孔子) , 주자(朱子) , 우암(尤鳶) , 화서(華西) , 중암(重庵) , 5위의 영정(影幀)을 집에 봉안하여 매일 아침 배알하고, 또 고을 북쪽 삼성당리(三星堂里)에 우왕(禹王) , 주공(周公) , 공자(孔子) , 3위의 단소를 설치하여 매월 삭망(朔望)으로 분향(焚香)하고 매년 10월 13일 제향을 받들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공의 초호는 용계(龍溪)였는데 만년에 용서(龍西)로 개호(改號)하였으며, 평생을 오직 학문에 몰두하여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고종(高宗) 41년 甲辰 9월 7일에 향년 60세로 돌아가시니 문인(門人), 지구(知舊)로서 조상(吊喪)한이가 수백인에 이르렀다.
배위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수락(秀洛)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두어 아들은 인하(寅夏) , 인은(寅殷) , 인주 (寅周) , 인호(寅昊) , 인우(寅虞)이며 , 사위는 전주최중악(全州崔中岳) , 전주이면응(全州李冕㒣)이다. 묘소는 신북면 계류리 방축동 선영 찬성공 묘소 우록 신좌(右麓 幸坐)에 합부(合祔)로 모셔 있다.
癸卯(1973) 3월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표는 화서(華西)선생의 5대손 이우필(李迂必)이 짓고, 비문은 안산김기춘(安山金基春)이 썼다.
유고(邊槁) 80여권이 있어 현손(玄孫) 봉현(鳳鉉)이 소장하고 있으며, 자손은 포천군 소홀면 고모리에 세거하고 있다.
※ 東國儒賢錄, 墓表.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