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풍(柳基豐), 양양공(襄陽公), Ryu, Gi-Poong, 생몰년:1796-1851, 세:28
憲宗朝 文臣, 侍郎公派, 자 대유(大有). 호 호은(湖隱).
취헌 이(醉軒 荑)의 14대손이요, 진곡 일함(榛谷 一咸)의 현손이요, 흥원(興源)의 장자로 정조(正祖) 20년 丙辰 11월 29일 청주 가중리(淸州佳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경전(經博)을 널리 통독하더니 순조(純祖) 19년 己卯(18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주서(注書)에 보직되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께서 공의 문필(文筆)이 뛰어나고 용모가 비범함을 보시고 친히 불러 손을 잡고 거주와 성명등을 묻고 매우 사랑하시었다.
그 후 전적(典籍) , 정언(正言) , 지평(持平) , 정랑(正郞) 등을 두루 거쳐 사직서령(社稷署令)으로 재직중 친환(親患)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주야로 눈길을 헤쳐 집으로 돌아오니 노자(奴子)가 문전에 엎드려 운명하셨다고 아뢰었다. 공이 까무라쳐 통곡하고 방에 들어서니 부친께서 문득 눈을 뜨고 몸을 좌우로 움직이었다. 모두 놀래어 즉시 수시(收尸)를 풀으니 부친께서 평소같이 일어나 말씀 하시기를 『네가 내려왔느냐 아까 꿈에 너를 보고 기뻐했더니 과연 꿈과 같구나』하시고 종일 담화를 하더니 저녘때에 이르러 다시 자리에 누워 몇 차례 신음한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공이 손가락을 끊어 주혈(注血)하여 비록 구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모두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고 칭송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후 헌납(獻納) , 집의(執義) , 승지(承旨) ,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외직으로 비인현감(庇仁縣監) , 양양부사(裵陽府使)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외직에 있을때 고질의 폐단을 제거하니 이민(吏民)들이 다 칭송하고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기념하였다.
철종(哲宗) 2년 辛亥 5월 5일 향년 56세로 졸하니 청주 사장동 선영하 술좌(淸州 射場洞 先塋下 戌坐)에 안장되었다. 공의 행장은 사헌부지평 심진규(司憲府持平 沈鎭圭)가 지었다.
배위는 남양홍씨(南暘洪氏) , 수원백씨(水原白氏) ,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4남 2녀를 두어 아들 면호(冕鎬)는 문과에 급제 교리(校理) , 승지(承旨)등을 지내고, 경호(景鎬)는 중부 기승(仲父 基升) 후로 출계하고, 성호(成鎬)요, 석호(奭鎬)이며, 사위는 영산신만근(雲山辛萬根) , 완산이범순(完山李範舜)에게 출가하였다.
자손은 청원군 남일면 가중리에 세거하고 있다.
※ 圍朝榜目. 侍郎公派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