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곡(柳轂), 광주공(光州公), Ryu, Gok, 생몰년: 1415-1482, 세:16
端宗朝 文臣, 中門祇候使公派, 자 치원(致遠), 호 독락정(獨樂亭)
제릉직장 중지(齊陵直長 中之)의 장자로 태종(太宗) 15년 乙未생인데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모친께 효도하고 아우와 우애하며 어질도 정직하였다.
세종(世宗) 23년 辛酉(1441)에 진사에 급제하고, 바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 장령(掌令) 및 내와(內外) 관직을 거치는 동안 명성(名聲)과 공적이 아울러 드러났었다.
세조(世祖) 7년 辛巳(1461) 7월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임중, 이곳에 안치(安置)되어 있던 상왕 단종(上王 端宗)의 매부 영양위 정종(寧陽慰 鄭悰)이 승도(僧徒)들과 결탁, 반란(叛亂)을 도모함을 방관(傍觀)했다는 죄목으로 파직(罷職)되어 동년 11월 춘천(春川)으로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예종(睿宗)즉위 戊子(1468) 9월 7일에 특명으로 전지(傳旨)가 내려 즉시 사면(赦免)과 동시에 직첩(職牒)을 환급(還給)받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충청도 임천(忠淸道 林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거처에 정자를 지어 『獨樂亭』이라 일명하고 자호(自號)를 삼는 한편 락천지명(樂天知命)으로 소요자적하니 이 고을 관장(官長)이 부임하면 공을 찾아와 정사(政事)를 자문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정(善政)의 방책(方策)을 일러주어 고을 백성들이 이에 힘입음이 많았다.
성종(成宗) 13년 任寅 윤 8월 25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 68세였다.
배위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장령 겸지(掌令 謙之)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겸전하여 집을 다스림에 법도 (法度)가 있더니 돌아가심에 임천 만지산 자좌원(林川 晩智山 子坐原)에 합부(合祔)하였다.
2남 3녀를 두어 장자 희가(希軻)는 진사요, 차자 희철(希轍)은 문과에 급제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되었으며, 사위는 현감 광주김오(縣監 光州金浯) , 의성김택중(義城金澤中) , 생원 삭념최철권(生員 朔寧崔哲拳)이다.
공의 묘갈명은 손자 빙고별좌 맹연(氷庫別坐 孟連)이 지었다.
후손은 부여군 충화면 만지리(扶餘那 忠北面 晩智里) , 복금리(福金里)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號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