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곤수 (柳鵾壽)

류곤수 (柳?壽), 칠송공(七松公), Ryu, Gon-Soo, 생몰년: , 세: , 류곤수(柳鵾壽), 칠송공(七松公), Ryu, Gon-Soo, 생몰년:1556-1592, 세:21
宣祖朝 才士. 左相公派, 자 정로(靜老). 호 칠송(七松)

영의정 노포당 순(領議政 老圃堂 洵)의 현손이요, 예빈시부정 성남(禮賓寺副正 成男)의 3자인데 백부 상원군수 덕남(祥原郡守 德男) 후로 출계하였다.
명종(明宗) 11년 丙辰생으로 21세 되던 선조(宣祖) 9년 丙子(1576)에 진사에 급제하고 그 후 수차 대과(大料)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를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아들 기(?)와 더불어 동일에 왜적(倭賊)에게 피해(被害)되니 나이 겨우37세였다.
배위 압해정씨(押海丁氏)는 고암 윤희(顧庵 胤禧)의 따님이요,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현감 일민(縣監 逸民)의 따님 인데 각기 따님 한분씩을 두고 아들이 없어 공의 생정 백형(生庭 伯兄) 감찰 구수(監察 龜壽)의 4자 진사 기(進士 ?)를 맞아 계자(系子)를 삼았다.
묘소는 포천 쌍곡리(抱川 雙谷里)에 있으며 묘지(墓誌)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지었다.
묘지에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 과업(課業)을 익힐적에 향선생(鄕先生)으로 부터 들었는데 어린 학동을 입을 다시며 칭찬하여 류수재(柳秀才)라 일컫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류수재를 만나 보았는데 나와 동갑(同甲)으로 이미 성동(成童)이었다. 그 학문은 오로지 위기(爲己)에 힘써 외식(外飾)을 꾸미지 않고 고금의 역사를 담론함에 온 좌석을 기울였으며, 의리의 분별에 있어서 절연(截然)하여 가히 범하지 못하겠고, 문예(文藝)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내가 그를 사모하여 그 실적을 알고저 하니 그 우인(友人)이 말하기를 그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누이가 아흡이나 되는 집에 입계(入系)하였는데 그 부모가 효행을 칭찬하고, 여러 누이들이 공손함을 칭찬하여 규문(閨門)의 법도가 시종 어김이 없고, 병든 아내의 남편으로써 내외로 순적(順適)하여 임석(衽席)간에 보호하기를 어린 아이 같이 하였으며, 일찌기 명금(名琴)이 있어 가보(家寶)로 전하여 왔는데 어떤 사람이 빌려가서 가져오지 않았어도 종신토록 한번도 묻지 아니하니 그 기개가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내가 그 뒤 더욱 그 아름다운 행실을 믿고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정하여 내가 이조정랑(吏曹正郎)으로 있을 적에 천거하여 사포서별제(司圖署別提)가 되었더니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나이 겨우 37세로 왜적에게 죽었다, 아아 ! 사람이 이 같은 재주가 있는데도 하늘이 돕지 않아 이에 그치니 운명인가? 혹 기품이 너무 청수(淸秀)하여 오래 견디지 못함인가? 생물(生物)의 이치가 일찍 성숙하면 또한 일찍 떨어지는 것인가? 알지 못하겠도다.』하였다.
※ 墓誌. 號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