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

류공권 (柳公權), 문간공(文簡公), Ryu Gong-Gwon, 생몰년: 1132-1196, 세: 7,

자는 정평(正平)

공은 대승 류차달(大丞 柳車達)의 6대손이요, 검교소부소감 총(寵)의 아들로 인종(仁宗) 10년(1132)생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초예(草隸)에 능하더니 의종(毅宗) 9년(1155)에 성균시에, 14년(1160)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청주목서기(淸州牧書記)로 나갔다가 3년 후 익양부록사(翼陽府錄事)로 옮겼는데 그 진퇴와 거동이 항상 법도가 있음으로 왕이 공의 충직한 자질이 대신(大臣)의 기량이 있음을 알고, 군신(君臣)간의 예우가 실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명종(明宗) 초에 직사관(直史館)에 있다가 병부랑중(兵部郞中)에 옮기고 얼마 후 예빈경(禮賓卿)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니 금(金)나라 사람들이 그 예를 안다고 칭송하였다.

19년(1189) 5월, 우승선으로 감시(監試)를 관장하여 시부(詩賦)로써 정수강(鄭守剛) 등 19인과 십운시(十韻詩)로써 이규보(李奎報) 등 62인의 명사들을 선발하니 학자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이듬해 국자감대사성에 올라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를 겸하고, 21년(1191) 4월에 한림학사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손희작(孫希綽) 등 29인을 선발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전직되었다가 우산기상시 지주사(右散騎常侍 知奏事)에 승진하여 계사(啓事)에 칭지(稱旨)함이 많았고, 또한 비익(裨益)됨이 허다하였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올라 25년 (1195)에 질병으로 퇴직을 청하니 왕이 그 문학을 사랑하여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이르기를 『조정에 구덕(舊德)이 있음은 사직(社稷)의 복이라, 경(卿)은 어찌 갑자기 물러나려 하는가?』하시었다. 공이 세 차례 글을 올리니 드디어 왕이 허락하셨다.

집에서 1년을 병석에 지내는 동안 친속들이 탕약(湯藥)을 올리면, 공이 이르되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있는 것이다』하고 끝내 마시지 않았다. 병이 위독함에 이르러 왕이 특별히 정당문학 참지정사(政堂文學 叅知政事)를 제수하였는데, 얼마 후 돌아가시니 향년 65세로 문간공(文簡公)의 시호가 내리었다. 공은 천성이 공평하고 청렴하였으며 관직에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공께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안화사(安和寺)에 이르러 어제(御製)에 응하여 지은 차운시(次韻詩)와 사직표(辭職表)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및 동문선(東文選)에 전하고 있으며, 친필이 해동필원(海東筆苑) 및 용인 광교산 서봉사(龍仁 光敎山 瑞鳳寺)의 현오국사비(玄悟國師碑)에 전하고 있다.

공의 묘지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려 있는데 그 명사(銘辭)에 이르기를,

문장은 족히 도를 관통하고, 사업은 족히 때를 구제했도다.
벼슬은 재상 지위에 올랐고, 덕의는 원로로 일컬었도다.
임금은 옛일을 생각하여 후에 포상이 후하였도다.
공께서 인도를 다했으니 이에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일대의 으뜸가는 스승이요, 만인의 선망이 되었도다.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백성들은 어디를 우러러볼까?
백세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송백은 푸르고 푸르도다.
이곳은 공의 묘소이니 혹시라도 손상치 말지어다.

※고려사열전. 묘지명.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입력: JR 09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