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공량(柳公亮), 하담공(荷潭公), Ryu, Gong-Ryang, 생몰년:1560-1624, 세:20
光海朝 文臣. 夏亭公派, 자 언명(彦明). 호 하담(荷潭)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6대손이요, 영암군수 희정(靈岩郡守 希汀)의 증손이요 증좌승지 용침(贈左承旨 用誛)의 손이요, 증이조참판 익(贈吏曹參判 益)의 장자로 명종(宣祖) 15년 庚申 12월 27일에 태어났다.
16세에 부친을 여의고 조모 평산신씨(平山申氏)와 모친 전주이씨(全州李氏)를 모시면서 뜻을 돈독히하고 학문에 힘쓰더니 선조(宣祖) 21년 戊子(1588)에 진사에 급제하고 23년 庚寅(1590)에 증광문가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
25년 壬辰(1592) 4월 조모 상을 당하였는데 곧바로 왜적(倭賊)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하였으나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모친을 모시고 충청도 내포(忠淸道 內浦)로 피란, 이곳에서 승중(承重)의 복(服)을 마치었다.
복을 마치자 바로 평안도 병마평사(平安道 兵馬評事)에 초수(超授)되고 28년 乙未(1595) 겨울에 만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와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 되어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
丙申(1596) 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 하여 동년 여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듬해 여름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옮겼는데 그해 가을 왜구(倭寇)가 다시 크게 침입하자 종묘(宗廟)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수안(遂安)까지 안전하게 피하였다가 왜적이 물러나자 서울로 모시고 돌아와 그공으로 구마(廐馬)를 하사받았다. 그후 다시 병조정랑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31년 戊戌(1598) 봄에 조정의 천거로 철산군수(鐵山郡守)로 나갔다. 이 고을은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으로서 본국과 중국의 사신(使臣)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또한 난리 끝에 공사(公私)로 세공(稅供)이 많았으나 공이 토산(土産)인 어염(漁鹽)을 판매하여 접응(接應)에 성의로서 조치하니 백성들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았다. 이듬해 질병이 있어 감사(監司)에게 누차 사직(辭職)을 청하니 백성들이 공을 유임(留任) 시켜줄 것을 감사에게 간곡히 청하고 드디어 체임되어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33년 庚子(1600) 가을에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일찍이 홍문록(弘文錄)에 참록(參綠) 되었으나 한번도 홍문관에 천망(薦望)을 얻지 못하고 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갔다. 이곳 평양은 큰 도회(都會)로서 일이 복잡하였으나 공께서 모든 부첩(簿牒)을 처리함이 민첩하고 송사(訟事)를 지체없이 처결하며 상하(上下)로 접대가 원만함으로 감사 서성(監司 徐渻)이 포계(褒啓)하여 이르기를 “형장(刑杖)을 쓰지 않음으로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35년 癸卯(1603)에 비변사(備邊司)의 천거로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전임되어 가는 날, 부민(府民) 만여명이 일시에 모여 성문(城門)을 굳게 닫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공께서 여러 사람 가운데 들어가 달래어 말하기를 “조정에서 차송(差送)하는 것을 너희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뜻을 내가 알고 있으니 물러들 가라”하니 여러 백성들이 모두 절하고 이별을 아쉬워 하며 비로소 문을 열어주고 또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강계에이르러 백성들의 세공(歲供)을 삭감하여 민생(民生)을 편안케하고 산천(山川)과 진보(鎭堡)의 험하고 평탄함과 완급(緩急)의 형세를 지도(地圖)로 그려 외적(外敵)방어의 긴요한 대책을 세웠다. 이곳에서 체임되어 돌아올 때 역시 백성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백리 밖까지 전송하며 눈물을 흘리고 또 비를 세워 선정(善政)을 칭송하였다. 이상 세 고을 관장으로 재임중 관찰사와 어사의 천거로 표리(表裏) 일습을 하사받았다.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戶曹參議) 및 승지(承旨)를 거쳐 40년 丁未(1609)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로 나갔다. 해랑적(海浪賊)이 해주(海州)에 몰래 들어와 노략질이 심하였는데 시론(時論)이 떠들썩하게 공을 모략하여 드디어 파직(罷職)되었더니 곧 사면(赦免)되어 승지(承旨)에 천망되었으나 사임하고 돌아왔다.
戊甲(1608) 봄에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다. 공이 승지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는데 광해군이 연신(筵臣)으로 더불어 치도(治道)를 논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시전(詩傳)에 이르되 시작은 있으나 끝을 맺음은 적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그 시작도 없는데 하물며 끝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시작인 근본을 먼저 힘쓰소서”하니 광해군이 얼굴빛이 변하여 기뻐하지 않고 경연을 파하였다. 동료 이상신(李尙信)이 공을 맞아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영공(令公)의 말씀은 간략하면서도 다하였으니 감히 어려운 말입니다.”하였다. 그 후로도 공은 지론(持論)이 확연하여 바른 말을 잘하므로서 임금의 뜻은 물론 간당(奸黨)들의 뜻을 거스림이 많았다.
광해군 원년 己酉(1609)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승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실록(實錄)편찬을 고정(考訂)하고, 이듬해 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80세에 가까운 노모(老母)의 봉양을 들어 체임을 청하여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전임하였다.
辛亥(1611)에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를 겸임하였으니 이는 어머님을 모시는데 별 지장이 없었으므로 사양치 않고 부임하였다.
4년 壬子(1612) 형난공신(亨難功臣)에 책록되어 문평군(文平君)에 봉하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이듬해 서양갑(徐羊甲) 등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여러 대신(大臣)들이 무고히 연좌(蓮座)되어 혹 죽고, 혹 유배(流配)되었는데 공께서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으로 더불어 극력 구원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병사 김경서(兵使 金景瑞), 참의 황치경(參議 黃致敬), 참의 임서(參議 林㥠) 등이 무고(誣告)를 입었다가 다 깨끗이 벗어났는데 이 또한 공께서 구한 힘이 많았었다. 그러나 공이 밖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이가 적었다. 한음상공(漢陰相公)이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내가 보건대, 류공(柳公)께서 사람을 국문(鞫問)할 즈음에 반드시 살리고자 하니 참으로 선인(善人)이라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나 가히 더불어 결혼하리라” 하고 그 장자 여규(如圭)로 하여금 청혼(請婚)토록 하여 그 아들 상건(象乾)이 공의 사위가 되었다.
7년 乙卯(1615)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 함흥부사(咸興府使)를 겸하였더니 9년 丁巳(1617) 가을에 질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겨울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옮겨 황해도관찰사 겸순찰사(黃海道觀察使 兼巡察使)로 나갔다가 11년 己未(1619)에 평안도체찰사(平安道體察使)로 전직되었다.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 하자는 소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 조정(朝廷)이 어수선할 즈음 광해군이 백관(百官)의 의논을 청취하였는데 공께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인륜(人倫)의 변란에 처하여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는데 원컨데 그 선을 택하소서”하니 그 말을 쫒으셨다. 동년 가을 성균시(成均試)에 공이 수시관(首試官)이었는데 시관 유대건(兪大健). 이정원(李挺元). 강수(姜燧)등이 모두 흉악한 무리들로서 제술(製述)의 공졸(工拙)을 논하지 않고 흉당의 자제들을 취하고자 하거늘 공이 일필(一筆)로 삭제하였다. 이에 그들이 공을 파직시킬것을 청함과 동시에 화복(禍福)을 들어 협박하였으나 공께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무고로 파직당하고 이듬해 8월에 모진 상을 당하였는데 일묘(一䖢)의 전답이 없고 봉록(俸祿)을 받은지 오래되어 장례(葬禮)는 물론 궤전(饋奠)을 받들 수가 없는지라 말을 팔아 이천(利川)에다 밭을 사서 노복(奴僕)들로 하여금 경작(耕作)토록 하여 궤연(几筵)을 받들고 장례를 모시었다. 壬戌(1622)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다시 산반(散班)에 머물러있다가 이듬해 봄에 이천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
癸亥(1623) 3월에 반정(反正)이 일어나 인조(仁祖)께서 즉위하신 후 페조(페朝)의 훈적(勳籍)을 추탈(追奪)하였는데 공 역시 사급(四級)을 강등(降等)당하여 부총관(副摠管)에 부쳐졌다. 공이 이르기를 “한음(漢陰)과 오성(鰲珹)이 또한 삭훈(削勳)을 당했는데 지금에 나의 강등이 어찌 부끄럽겠는가?”하였다. 조금 있다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반정이 오래되지 않아 인심이 흉흉한지라 여러 훈신(勳臣)들이 구신(舊臣)들을 꺼려 비밀로 널리 조사하더니 마침내 밤중에 왕을 청대(請對), 고변(告變)하기를 “구신들이 역적 이괄(李适)과 내통하고 있습니다.”하고 전영의정 기자헌(前領議政 奇自獻)을 위시하여 공 등 38인을 구금하여 하옥(下獄)시키었다. 얼마 후 이괄의 반란으로 왕이 도성(都城)을 비우고 피란할 즈음 훈신들이 또 왕에게 아뢰기를 “내변(內變)이 두려우니 옥중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여야 하옵니다.”하고 드디어 그날밤에 참형(斬刑)에 처하니 때는 인조 2년 甲子 정월 24일로 공의 나이 65세였다.
그후 이상국원익(理想國元翼)등이 수차에 걸쳐 甲子년 원사(寃死)를 신설(伸雪)할 것을 청하여 5년 丁卯(1627) 3월에 왕명으로 설원과 아울러 복직(復職되었다.
공은 천성이 중후하고 도량이 커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관직에 임해서는 진심으로 공사(公事)를 처리하였다. 그리고 항상 선조 하정공(夏亭公)의 청렴한 행적을 거울삼아 평생에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세거(世居)하던 집이 전란을 겪어 퇴락하였는데 공께서 수리하여 만년에 거처하였으며 참화를 당하는 날까지 척포(尺布)도 남긴적이 없었다. 또한 천성이 정직하여 교류와 명예를 싫어하였고 광해군의 정란(政亂)에는 더욱 뒤로 물러나 권세를 피하였으며 도원수 장만(都元帥 張晩)과는 지기(知己)의 벗이었으나 마침내 가혹한 화를 입었으니 어찌 시운(時運)때문이 아니었겠는가?
甲子 3월에 광주 국정리(廣州 菊亭里) 원적산(圓寂山)아래 장례를 모셨다가 효종(孝宗) 7년 丙申(1656)에 이천(利川) 고을 남쪽 10리 거리 유곡 건좌(酉谷 乾坐)에 이장하였다. 공의 행장은 아들 훤(萱)이 짓고 묘갈명은 봉상시정 용인이진은(奉常侍正 龍仁李震殷)이 지었다.
배위 여흥민씨(驪興閔氏)는 진사 사온(進士 思溫)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으니, 행(荇), 훤(萱), 운(篔)이며, 용인이씨(龍仁李氏)는 학생 숭선(學生 崇善)의 따님으로 1녀를 낳아 의금부도사 광주이상건(義禁府都事 廣州李象乾)에게 출가시켰다. 또 서출(庶出)에 2남 4녀가 있어 서(䈝), 전(筌)과 이지(李指), 안만건(安萬健), 한율(韓慄), 정(鄭)이다.
장자 행(荇)은 자 여용(汝容)인데 선조 辛巳(1581)생으로 己酉(1609)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참봉(參奉)에 보직되었다가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를 지내던중 광해군 壬子(1612)에 병몰(病歿)하였다.
2자 훤(萱)은 자 여실(如實)이요, 호 절초당(節初堂)인데 선조 19년 丙戊(1586) 생으로 광해군 6년 甲寅(1614)에 생원(生員)에 급제하였다. 음사(蔭仕)로 호조좌랑(戶曹佐郞),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를 거쳐 영동(永同), 화순(化順), 창평(昌平)의 현령을 두루 지내고 현종(顯宗) 2년 辛丑(1661)에 향년 76세로 돌아가셨다. 공께서 문행(文行)이 뛰어나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문집(文集)이 전하고 있으며, 도암 이재(陶庵 李縡)가 묘지를 지었다.
3자 운(篔)은 자 여장(汝長)인데 선조 27년 甲牛(1594)생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기더니 겨우 15.6세에 사륙체(四六體) 수백수를 지으니 청륙 김덕겸(靑陸 金德謙)이 보고 크게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음사로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조석으로 부모를 곁에서 모시면서 형제간에 화목을 다하였다. 인조(仁祖) 2년 甲子(1624) 이괄의 반란에 부친께서 비명(非命)에 돌아가심을 통탄하고 양례(襄禮)후에도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더니 상중에 시골 집에서 돌아가시니 때는 동년 6월 5일로 겨우 31세였다.
공의 후손이 이천군 부발면 마암리(利川郡 夫鉢面 馬岩里), 모가면 진가리(慕加面 陳加里), 부발면 신하리(夫鉢面 新河里), 용인군 내사면 주북리(龍仁郡 內斜面 朱北里),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始興君 儀旺郡 五全里)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行狀. 萱碍銘.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