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공신 (柳公信)

류공신(柳公信), 송계공(松溪公), Ryu, Gong-Sin, 생몰년:1579-1655, 세:20
宣祖朝 孝行. 夏亭公派, 자 윤보(允甫). 호 송계(松溪),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6대손이요, 영암군수 희정(靈岩郡守 希汀)의 증손이요, 참봉 용감(參奉 用鑒)의 손이요, 항(恒)의 2자로 선조(宣祖) 12년 己卯 6월 22일 나주 모산(羅州 茅山)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아름답고 순박하며 효성이 뛰어나더니 8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체를 붙들고 슬피 울부짖음이 성인(成人)과 같으므로 보는이가 모두 효동(孝童)이라 일컫었다.
장성하여 홀로 계신 노모(老母)를 모심에 집이 매우 가난하여 봉양이 어려움으로 울타리를 막아 닭을 기로고,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길러 그로서 반찬을 몸소 만들어 조석으로 공봉하였다. 매양 입에 맞는 음식을 물어보고 만일 잡숫고 싶은 것이 있다면 비록 먼곳이라도 가서 반드시 구하여 대접하였다. 그리고 조석(朝夕)으로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반드시 사당(詞堂)에 들어가 재배(再拜)하고 물러나곤 하였다.
인조(仁祖) 10년 壬申(1632)에 노모(老母)께서 병석에 누우심에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옷에 띠를 풀지 않고, 또 밤이면 하늘에 기도하여 쾌유를 빌었으나 끝내 돌아가심에 슬픔을 못이겨 관(棺)을 붙들고 울어 마지 않았다. 묘소 곁에 초막을 치고 3년을 시묘(侍墓)하면서 조석으로 묘소에 나아가 꿇어앉아 통곡하니 묘정(墓庭)에 풀이 나지 않았따. 복제(服制)를 마친 후로도 죽을 먹으면서 오히려 상인(喪人)으로 자처하니 친우가 민망히 여기고 말리자 공이 곡하며 대답하기를 “부모의 은혜는 하늘같이 다함이 없는데 불행히도 일찍 부친을 여의었으니 이제라도 추복(追服)하여 은공(恩功)을 갚으리라”하고 여막(廬幕) 에서 조석으로 곡읍(哭泣)하고 부친의 묘소를 오르내리면서 정례(情禮)를 다하였다. 한편 묘소 곁으로 솔과 잣나무를 둘러 심어 울창하였으며, 사친곡(思親曲)을 지어 스스로 부르며 사모하였다.
본도 관찰사(本道 觀察使)의 장계(狀啓)로 당시에 정려(旌閭)가 내리었다.
효종(孝宗) 6년 乙未 8월 28일에 향년 77세로 돌아가시니 지금 영암군 금정면 분수동 독산 경좌(靈岩郡 金井面 汾水洞 獨山 庚坐)에 안장되었다.
배위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참봉 진(參奉 鎭)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어 아들은 기(箕)와 첨(籤)이요, 사위는 순천박재창(順天朴再昌)과 광산김상엽(光山金尙燁)이다.
삼종제(三從弟) 사교당 준(四矯堂 浚)이 공의 묘갈명을 짓고, 족손(族孫) 약재 상운(約齋 尙運)이 비문을 썼다.
후에 재사당 이원(再思堂 李阮)을 향사하는 나주 영강사(羅州 榮江祠)에 배향되어 지금도 유림(儒林)이 행사하고 있다.
※ 萱碍銘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