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구징 (柳龜徵)

류구징(柳龜徵), 갑산공(甲山公), Ryu, Goo-Jing, 생몰년:1649-1713, 세:22
肅宗朝 文臣. 夏亭公派, 자 중구(仲丸)

형조판서 안숙공 계문(刑曹判書 安肅公 季聞)의 8대손이요. 장흥부사 희선(長興府使 希先)의 현손이요, 증대사헌 운(贈大司憲 貫)의 2자로 인조(仁祖)27년 己丑 7월7일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肅宗 3년 T巳(167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6년 庚申(1680)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내고 체임되어 돌아오니 백성들이 선정(善政)을 칭송하였고 남원부사(南原府使)재임시에는 토질(土疾)을 제거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연일현감(延日縣監)으로 나가서는 묵은 폐단을 없앴다. 당시 북방(北方)의 오랑캐들이 갑산(甲山)고을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조정에서 이를 근심하고 갑산부사(甲山府使)를 제수하였는데 공께서 도임(到任)후 얼마 안되어 변방이 조용해 졌다.
공께서 평생에 경사(經史)를 별리 섭렵(涉獵)하고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으며, 빈부(貧富)와 득실(得失)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비록 소관(小官)에 있었지만 세력을 취하여 귀현(貴顯)한 가문에 출입함을 부끄러이 여기었다. 동종(同宗) 류상국 상운(柳相國 尙運)이 그 명망을 듣고 한번 서로 보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니 상운(尙運)이 깊이 칭찬하였다.
네 고을 수령 (守令)을 지냈는데 한결 지성으로 공무(公務)에 봉직하여 치적(治績)을 크게 떨쳤으며, 청렴한 지조가 더욱 사람에 뛰어나 칭송이 자자하였다.
39년 癸巳 12월 4일, 향년 65세로 돌아가셨는데 장례 비용이 없었으니 공의 청렴함을 가히 알겠도다.
배위 진양하씨(晋暘河氏)는 성구(聖龜)의 따님이요, 함평이씨(戒平李氏)는 인무(寅茂)의 따님인데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백씨 호징(伯氏 虎徵)의 2자 하술(夏述)을 맞아 계자(系子)하였다.
하술(夏述)의 자는 술부(述夫)인데 숙종(肅宗) 43년 T酉(1717)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음사(蔭仕)로 목릉참봉(禮陵參奉)을 지내었다.
공의 묘소는 포천(抱川) 남쪽 병품원 갑좌(屛風院甲坐)에 합부로 모셔 있고, 묘비문은 공의 아우 좌윤 봉징(左尹 鳳徵)이 지었다.
※ 墓表. 在澗集. 丁巳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