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관 (柳寬)

류관 (柳寬), 문간공(文簡公), Ryu, Gwan, 생몰년: 1346-1433, 세: 13, 夏亭公 派祖
麗末鮮初 文臣. 청백리록. 처음 휘(諱) 관(觀), 처음 자(字) 몽사(夢思), 뒤에 휘(諱) 관(寬), 자(字) 경부(敬夫). 호(號) 하정(夏亭)

공은 예부상서 언침(禮部尙書 彦沈)의〔※柱1---문화류씨보감 37쪽 류희(柳羲) 편에서는 彦沉으로 표기되어 있음〕의 5대손이요, 삼사판관 안택(三司判官 安澤)의 차자로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 丙戌 11월에 태어났다.
공민왕(恭愍王) 18년 己酉(1369)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고 20년 辛亥(1371)에 문과에 급제하여 비서교감(秘書校勘), 상서주부(尙書主簿), 춘추검열(春秋檢閱), 예문공봉(藝文供奉), 진덕박사(進德博士)를 두루 거쳤다.
우왕(禑王) 2년 丙辰(1367)에 예의랑(禮儀郞)으로 배어대〔(糸非)漁袋〕를 하사 받고, 판도좌랑(版圖佐郞)을 거쳐 4년 戊午(1378)에 전보판관(典寶判官)으로 자금어대(紫金漁垈)를 하사 받고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 전리정랑(典理正郞), 소부소윤(少府少尹),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13년 丁卯(1387)에 지봉주사(知鳳州事)로 나갔다.
창왕(昌王) 원년 己巳(1389)에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사예(成均司藝), 보문직제학(寶文直提學), 전농부정(典農副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공양왕(恭讓王) 원년 庚午(1390)에 지제교(知製敎)로서 시관(試官)이 되어 전농정(典農正)으로 경력사경력(經歷司經歷)을 겸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내사사인(內史舍人), 병조의랑(兵曹議郞),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을 거쳐 태조(太祖) 3년 甲戌(1394) 11월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재직중 론모악정도길흉소(論母岳定都吉凶疏)를 올려 왕의 윤허를 얻고, 5년 丙子(1396)에 시관으로 김익정(金益精)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됨에 전(箋)을 올려 사양하고,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좌상기상시(左散騎常侍),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 보문직제학(寶文直堤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형조전서(刑曹典書)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종(定宗) 원년 己卯(1399)에 이조전서(吏曹典書)에 제수되고, 이어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태종(太宗) 3년 癸未(1403)에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전임되었다가 5년 乙酉(1405)에 전라도관찰사겸출척사(全羅道觀察使兼黜陟事)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내직으로 들어와 예문대제학(藝文大堤學)으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임하였다.
태종(太宗) 6년 10월에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7년 丁亥(1407)에 돌아와 개성유후(開城留候)를 거쳐 9년 己丑(1409)에 다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堤學)으로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임하고 이듬해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2년 壬辰(1412)에 징유처취처소(懲有妻取妻疏)를 올려 윤허를 얻고 14년 甲午(1414)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어 전직(前職)을 겸하였다. 이어 노비 변정도감제조(奴婢 卞正都監提調)로 있다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수문전대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憁制府事)를 거쳐 18년 戊戌(1418)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堤學)으로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임하였다.
세종(世宗) 원년 己亥(1419)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憁制府事)를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堤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로 재직중 변계량(卞季良)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다가 중단되었다. 이듬해 문과고시관(文科考試官)으로 조상치(曺尙治)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세종(世宗) 3년 辛丑(1421)에 왕은 공의 년로(年老)함을 민망히 여겨 궤장(几杖)을 하사하므로 공께서 전(箋)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치사(致仕)를 청함에 윤허(允許)하지 않으시고 비답(批答)을 내려 아악(雅樂)과 주찬(酒饌)을 하사 하시고, 대언 권맹손(代言 權孟孫)을 보내어 선온례(宣醞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5년 癸卯(1423)에 고려사범례(高麗史凡例)를 수정(修正)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기납(嘉納)됨과 동시에 윤회(尹淮)와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였다.
세종(世宗) 6년(1424)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수(除授)되어 초구(貂裘)를 하사받았다. 7년 乙巳(1425)에 한재(旱災)로 인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고 오히려 비답을 내려 집현전부제학 권도(集賢殿副提學 權蹈)로 하여금 공의 사택(私宅)에 사찬(賜餐)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또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世宗) 9년 丁未(1430) 가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치사(致仕)하니, 왕은 녹봉(祿俸)을 종신토록 급여(給與)하라고 명하였다.
12년 庚戌(1430)에 왕은 어주(御酒)를 하사하고 14년 壬子(1432) 겨울에는 공과 방촌 황희(厖村 黃喜)에게 장피(獐皮)를 각각 하사하였다.
세종(世宗) 15년 癸丑(1433) 5월 7일 돌아가시니 향년 88세였다.
왕은 부움(訃音)을 들으시고 백의(白衣)를 갖춘후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홍례문(弘禮門)밖에 납시어 조상(弔喪)하시고, 금천교(金 川橋)에 이르러 치제(致祭)에 친히 임하여 슬품을 다하시고 문간공(文簡公)의 시호를 내림과 아울러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하였다.〔※柱2---서울특별시 하정(夏亭)청백리상 운영에 관한 조례안이 2009년 7월 10일(금)서울특별시 의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어 청렴한 공무원을 발굴, 시상함으로써 청백리 정신을 고양하고 공직사회 반부패 문화 정착 및 대시민 청렴공감대를 형성하는 등 청백리 시상제도에 관한 근거를 마련하여 매년 하정청백리상을 수여하고 있음〕
동년 7월 12일 주상(主上)께서 사제문(賜祭文)을 내리였다.
묘소는 양근 남촌 왕충리(楊根 南村 王忠里) 신좌(辛坐)의 언덕에 모셨으며 청향당 윤회(淸香堂 尹淮)가 만시(挽詩)를 지어 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였다.
공은 천성이 공검정직(恭儉正直)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열람하였을 뿐 아니라 무경(武經)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涉獵)하지 않음이 없었고 평생에 오직 서사(書史)를 스스로 즐기었다.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중 계주(啓奏)하기를『사람의 기품은 경박하고 강인함과 유약하고 비겁함이 같지 않기 때문에 혹은 진범(眞犯)이라도 능히 수초〔(扌垂)楚〕를 견디어 끝내 죄를 실토하지 않고, 혹은 무고(誣告)를 입고도 고초를 참지못하여 끝내 죄를 면치 못하는 자가 있는데 형(刑)을 관장하는 이는 오직 승복(承服)하는 것만 좋아하여 인명(人命)을 중히 여기지 않고 법외(法外)의 형벌을 행함에 그 죄상(罪狀)의 경중(輕重)은 분간하지 못하고 장하(杖下)에 죽어가는 사례가 허다하오니 이는 성상(聖上)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어김입니다. 청컨대 내외로 형을 다스리는 자에게 명하사 율문(律文)에 의하여 고문(拷問)을 행할 것이요, 그 법외(法外)의 형벌은 일체 금지시켜야 하옵니다. 항상 그 사색(辭色)을 분별하고 그 증거를 징험하며 그 진위(眞僞)를 분명히 하여 무고한 수초〔(扌垂)楚〕를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하였는데 왕께서 가납(嘉納)하시었다.
공께서 청빈(淸貧)하여 흥인문(興仁門:東大門) 밖에 누추한 집이 몇칸 있었는데 울타리도 없었다. 그러나 손님이 오면 탁주(濁酒) 한동이를 섬돌 위에 놔두고 한 노비(老婢)로 하여금 한 종지씩 술을 따르도록 하여 각기 몇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재상(宰相)의 귀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후진(後進)의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제생(諸生)들이 청강(聽講)을 청하는자 많았는데 그 아무의 자제(子弟)나 성명(姓名)을 묻지 않고 반드시 순순히 가르쳤기 때문에 문하(門下)에 학도(學徒)가 매우 많았다.
매년 시향(時享) 하루 전에 제생들을 보내고 제사(祭祀)를 행한 후에 제생들을 불러 음복(飮福)을 하였는데 조촐한 음식 소반을 서로 돌려가며 안주를 들도록하고 동이의 탁주를 먼저 한잔 마신 다음 차례대로 잔을 돌리었다.
태종께서 공의 청빈함이 이와 같은 줄 알고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그 집에 울타리를 막아주고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또 어찬을 그치지 않고 하사하였다.
공께서 청렴 검소함을 스스로 지켜 몇칸 모옥(茅屋)에 살면서도 마음은 항상 편안히 가졌다. 얼찌기 장마가 한달을 넘도록 계속되어 지붕에서 무리 줄줄 세었다. 공께서 손수 우산을 바치고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이 비를 피하겠는가』하니 부인께서 대답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반듯이 대비함이 있을 것입니다』하자 공은 웃기만 하시었다.
공께서 지위가 정승(政丞)에 이르렀지만 행장(行裝)은 필부(匹夫)와 같았고, 혹 사람이 찾아와 배알(拜謁)코자 하면 겨울에도 짚신을 끌고 나가 맞이하였으며, 때때로 호미를 잡고 채전(菜田)을 가꾸되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
일찍이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開設)하고 어명(御命)으로 공께서 영수사관(領修史官)이 되었다.
절이 성내(城內)에 있었는데 혹은 연모(軟帽)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여마(與馬)는 번거롭다하시고 혹은 관동(冠童)들을 데리고 시(詩)를 읊으며 갔다 돌아오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감복하였다.
공께서는 총명함이 보통 사람에 넘어 평생에 배운 바를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매일 밤중에 그 글을 외우고 그 뜻을 생각하여 항상 사람을 도움으로 마음을 삼았다. 때문에 교량(橋梁)과 원우(院宇)를 만들고자 하면 비록 승도(僧徒)들도 즉시 전백(錢帛 )을 내놓고 갔으며, 사람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며 비록 미물(微物)일지라도 그를 잡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붕우(朋友)간에 재물을 통하면 의리(義理)가 깨진다. 그러나 간색(干索)을 삼감이 옳은 일이다』하셨다.
일찍이 찬성(贊成)으로 재직중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왕은 윤허하지 않고 비답(批答)하시기를 『경(卿)의 학문은 정자(程子), 주자(朱子)에 미치고, 재주는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에 비길 수 있다. 마음은 충직(忠直)을 근본하고 행동은 안화(安和)를 위주하였다. 실로 조정(朝廷)의 규범(規範)이요, 유림(儒林)의 종사(宗師)로다』하시었다.
공께서 지은 시문(詩文)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영일(迎日), 정선(旌善), 낭천(狼川) 고을 등의 제영(題詠)과 영암(靈巖)의 형승(形勝)과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의 시(詩)등이 있다.
배위 광릉군부인 광주안씨(廣陵郡夫人 廣州安氏)는 판전농시사 기(判典農寺事 器)의 따님으로 3남을 두고 돌아가셨으며 풍주군부인 이씨(豊州郡夫人 李氏)는 전서 송(典書 悚)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장자 맹문(孟聞)은 문과 예조참판(禮曹參判)이요, 2자 중문(仲聞)은 호군(護軍)이요, 3자 계문(季聞)은 문과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안숙공(安肅公)이요, 4자 이문(異聞)은 천호(千戶)이다.
중종조(中宗朝)에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선생이 이르기를 『근세에 이학(理學)으로 포은(圃隱)과 하정(夏亭)이 가장 바르다』하였다.
중종 15년 庚辰(1520) 4월 6일 왕이 조강(朝講)에 납시어 이르시기를 『국조(國朝)에 청렴(淸廉)으로 이름난 재상 류관(柳寬)은 가세가 심히 가난하여 사는 집이 풍우(風雨)를 가리지 못하였다. 만약 장마를 만나면 반드시 우산으로 가리면서도 스스로 편안히 여기고 말하기를 이같은 장마에 우산이 없는 이는 어찌 능히 지내겠느냐 하였다고 하니 이같은 분은 가히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27년 壬辰(1532) 4월 의정부(議政府)에서 청백리(淸白吏) 자손을 록용(錄用)할 것을 임금께 건의하였는데 이때 공의 휘자(諱字)를 제일 먼저 들치었다.
현종(顯宗) 11년 庚戌(1670)에 문화(文化)고을에 공을 향사(享祀)하는 사우(祠宇)가 건립되고, 숙종(肅宗) 4년 戊午(1678)에 이 사우를 정계서원(程溪書院)으로 사액(賜額)하였다.
철종(哲宗) 13년 壬戌(1862)에 양근 왕충리(楊根 王忠里)에 있는 공의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 )를 세웠는데 당시 예조판서 신석우(禮曹判書 申錫愚)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壬戌(1982)에 후손 세거지인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靈巖郡 新北面 茅山里)에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또 세웠다.
甲子(1984)에 정부(政府)에서 서울시내 가로(街路)의 명칭을 재정하였는데 지금 동대문구 신설동(東大門區 新設洞) 사거리로부터 제기동(祭基洞), 마장동(馬場洞)을 거쳐 답십리동(踏十里洞)에 이르는 약 10리〔※柱3---4km〕구간의 대로를 하정로(夏亭路)로 명명하였으니 이는 공께서 이 부근에 살으셨던 때문이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海東名臣錄, 號譜.

하정공의 유적

▷ 우산각공원(雨傘閣公園)(동대문구 신설동 로타리 숭의여중 동대문도서관 앞)
▷ 하정로(夏亭路)(청계천 비우당교~동대문등기소 652m 왕복 2차선 도로)
▷ 비우당공원(庇雨堂公園)(종로구 창신동 청룡사 뒤편)
▷ 비우당교(庇雨堂橋)(청계천 8가~9가 사이)
▷ 류관묘역(柳寬墓域)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유좌(酉坐)「경기지방문화재(京畿地方文化財) 제62호)」로 보존하고 있으며 「夏亭遺集-이기양(李基讓) 서(序)와 「夏亭集-이건창(李建昌) 서(序)가 전하고 있다. 류관이 살다간 집은 지금의 서울의 동대문 (흥인문)밖 낙산(駱山)밑의 어귀에 있었다. 동남쪽 기슭에 초라한 움막 여러 채를 짓고 살았던 집터이다. 우산각(雨傘閣)이라 하여 대대로 보존하여 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그 모습이 훼손되고 없어져 버렸다. 하도 딱하게 여긴 태종(太宗)이 밤새 몰래 영선공(營繕工)을 보내서 집 주위에 울타리(把子)를 설치해 주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에서 주관 1996년부터 시작된 낙산복원사업을 통해 유서(由緖)깊은 우산각(비우당)도 복원되었다.

낙산공원(駱山公園)의 비우당(庇雨堂)

서울시 이화동(동숭동 산 2-10번지 일대)이 낙산공원으로 면적은 152.443㎡이며 낙산은 산 모양이 낙타(駱駝)/camel)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서울 종로구와 동대문구 그리고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된다. 일제 강점기 전까지는 깨끗한 수석(水石)과 무성한 숲으로 시민들의 산책 장소였으며,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였다.
1996년부터 서울특별시에서 주관한 낙산복원사업을 통해 자연환경과 역사적 문화환경을 복원함으로써 쾌적한 공원경관을 제공하고 자연 탐방을 통해 역사와 문화교육의 장(場)을 제공할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2005년 10월 1일 오후 7시를 기하여 청계천 복원공사가 준공, 개통식이 시작했다. 다리가 22개 놓였는데 청계천 8가~9가 사이에 아치형의 다리가 있다. 황학동과 왕십리동을 잇는 다리로 총연장 44.5m 폭 26.5m의 4차로가 2개의 아치 케이블이 다리 위로 뻗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류하정(柳夏亭)께서 초가(草家)를 짓고 사셨는데, 어찌나 청빈(淸貧)한지 장마철이면 집에 비가 새게 마련이었고 비가 새면 과거급제 때 하사받은 일산(日傘)을 펴들고 비를 피하면서 이 일산이 없는 집은 장마철에 어떻게 비를 피하겠소.라고 물었다 하여 이집을 우산각󰡑마을을 우산각골이라 하였다. 류하정(柳夏亭)의 오대손녀서(五代孫女壻)이며 호(戶)병(兵)형(刑) 삼조판서(三曹判書)를 역임한 동고(東皐) 이희검(李希儉 1516~1579)이 청빈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이집에서 살았다. 그 뒤 아들인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 1563~1628)『芝峰遺說(지봉유설)』저자 시(諡) 문간(文簡) 공(公)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주춧돌만 있는 터에 집을 짓고 비를 겨우 가린다.는 뜻으로 庇雨堂(비우당)이란 당호(堂號)를 삼고 살았다. 후세에 귀감(龜鑑)으로 계승하고자 설치되었다.

한양천도 상소문

조선을 건국한 태조께서 당시 수도를 정함에 있어 송도(개성)에 그대로 있자는 설(說)과 한양(서울)으로 옮기자는 설(說)과 또한 계룡산 신도안설 등으로 수년을 끌어오던 중 당시 사헌부(司憲府) 중승(中丞)이던 류관(柳觀)께서 한양정도를 주장하여 동료들과 더부러 상소를 올린바 마침내 윤허(允許)되었다.
태조조논무악정도소(太祖朝論毋岳定都疏)
臣等 言地理之法 臣等 素所不學 其逆順吉凶之理 不敢妄議 姑以立都之法 言之 自古帝王所都 形勢廣闊 可以奠民居 舟楫通達 可以運租粟 道里相均 可以禦四方 土地高爽 可以避水災 四者不備 不可謂之善矣 三代以上 莫之詳考 獨惟周室定都 可得而言者 商之歷年六百紀矣 武王伐紂而 有天下都于鎬京 成王承武王之志 遷都洛陽以開八百年之社稷 夫洛陽形勢寬廣 而通舟楫 土地亦高爽 而道里均固 有四者之善也 臣等 竊謂松都卽周之鎬京 漢陽卽周之洛陽也 夫天下之廣也 而古今帝都 不越乎關中洛陽金陵 數處而已 況我 國家四境之內 不過萬里 可都之地 豈能多有 惟松都與漢陽 善之善者也 臣等 又聞民心所存卽天命所在 去年春 定都于鷄龍 民咸憂之何者 以其形勢狹隘 而土地汚下 道里不均 而水道汚遠也 今之遷漢陽也 民咸喜之 曰 漢陽之形勢 土地水路道里與松都相似 若遷之則 無右於漢陽 臣等 以民心觀之則漢陽 誠殿下天命之都也 伏惟 殿下俯順民心 定都于玆 行周家仁厚之政 歷年之多 遠過於成周矣 何必拘於術數 更枚卜乎 今觀毋岳之南 舟楫之通 道路之均 固有之其形勢狹隘 將不容朝市之設 土地迂下 恐復有墊溺之患 誠不合於聖代之所都也 且以術數言之 安咸老董原中之書 詭言以高其術 開端以示其信 不可的知其處 又不可盡解其語 觀其漢江心腹 上有三峰 等論 意其漢陽府內 是其所指也 臣等 管見止此 惟聖鑑裁擇焉 上依 允定都于漢陽.

상소문 한글 풀이

신(臣) 등(等)은 아뢰나이다. 지리의 법은 신 등이 배운바 아니오라 그 역순(逆順)과 길흉(吉凶)의 이치는 망령되이 논의할 수 없사오나 다만 도읍을 정하는 법으로 말하면 예부터 제왕이 도읍을 정함에 있어 자세가 평탄하고 넓어야 백성이 잘 살 수 있으며 수육륙水陸)의 교통이 통달하여 곡식 등 물자를 운반할 수 있으며 이정(里程)의 거리가 서로 고르려야 동서남북을 통치할 수 있으며 토지가 고상(高爽)하여야 가히 수재(水災)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네 가지가 갖추어지지 못하면 좋다 할 수 없으니 하(夏)은(殷)주(周) 등 중고(中古)시대는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주나라의 도읍을 정한 것은 말할 수 있으나 상(商)나라의 식년(殖年)이 6백 년인데 무왕(武王)이 주(紂)를 토벌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호경(鎬京)에 도읍하고 성왕(成王)이 무왕을 이어 낙양(洛陽)에 도읍을 옮기어 8백 년이나 사직(社稷)을 이었으니 대저 낙양은 지세(地勢)가 평탄(平坦)하고 넓으며 뱃길이 통하고 땅이 또한 고상(高爽)하며 도리(道里)가 서로 고르니 이 네 가지 좋은 점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나이다.
신(臣) 등(等)은 간절히 아뢰나니 송도는 곧 주(周)나라의 호경(鎬京)이요 한양은 곧 주(周)나라의 낙양(洛陽)이라 할 수 있나이다. 대저 천하(天下)가 지극히 넓다하되 고금(古今)에 도읍한 곳이 관중(關中),낙양(洛陽), 금릉(金陵) 등 두어 곳에 지나지 않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사방이 일만 리(里)도 못되어 도읍을 할 수 있는 땅이 많이 있겠습니까?
생각하옵건대 송도와 한양은 좋은 곳 중(中)에서도 가장 좋은 곳인가 하나이다. 신(臣) 등(等)은 또 풍문(風聞)에 들으니 민심(民心)이 있는 곳에 곧 천명(天命)이 있다.하나이다.
지난해 계룡산(鷄龍山)에 도읍을 정하려 할 적에 백성들이 모두 근심하였나이다. 무슨 연고(緣故)인가? 하오면 그 형세가 좁고 땅이 얕으며 도리(道里)의 원근(遠近)이 고르지 못하고 물길이 먼 때문 이였나이다. 이제 한양에 도읍을 옮기려 하심에 백성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한양의 땅 형세가 도로와 수로(水路)가 송도와 서로 같으니 기왕 옮기시려면 한양보다 더 좋은 곳이 없겠나이다.
신(臣) 등(等)이 민심을 잘 살펴 보건대 한양은 진실로 하늘이 전하(殿下)께 주신 도읍지이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민심을 굽어 살피시어 이에 도읍을 정하시고 주(周)나라의 인후(仁厚)한 정사(政事)를 행하시면 역년(歷年)의 많음이 주나라 보다 더욱 오래 갈 것이 온대 하필(何必) 술수(術數)에 거리끼어 다시 점(占)쳐서 구하리까? 이제 술가(術家)들의 말을 살펴보니 무악산(毋岳山)의 남쪽에 배가 통할 수 있고 사방의 도로(道路) 원근(遠近)이 균등(均等)하기는 하나 그 형세가 아주 좁아서 조정과 시장을 개설(開設)하는데 적당치 못하고 땅이 얕아서 뒤에 수침(水沈)의 환란이 있을까? 두려우니 실로 성대(聖代)의 도읍은 합당치 아니하옵고 또 술가(術家)로 말씀하오면 이른바 그 방면에 대가(大家)라는 안함노(安咸老)와 동원중(董原中)의 저술이 부질없는 말로 그 술수를 높이고 처음은 좀 믿음을 받았으나 그 지점을 헤아려 찾을 수 없으며 그 말을 가히 이해할 수도 없는데 한강의 심복 위에 삼봉(三峰)이 있다.는 말을 보면 한양부(漢陽府) 내(內)가 그 술수에 말한 땅이 아닌가 하나이다.
신(臣) 등(等)의 좁은 소견(所見)은 이에 그치오니 오직 성상(聖上)이 살피시어 도읍지를 선택하소서.
왕(王)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것을 윤허(允許)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였다.
태조 3년(1384년) 갑술(甲戌) 11월(月)

吾家長物惟淸白 유훈 남긴 淸白吏

1. 하정공파보 1권 64쪽)
示姪思訥(조카 사눌에게 보임)
此夜燈前酒數巡(차야등전주수순)
汝年三十二靑春(여년삼십이청춘)
吾家長物惟淸白(오가장물유청백)
世世相傳無限人(세세상전무한인)
이 밤 등불 앞에 술을 주고 받거니
너의 나이 32세 청춘이로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사물은 오직 청백(淸白)이니,
대대(代代)로 서로이어 끝없이 전하라.(3, 4행은 하정공의 유훈(遺訓) 시로 자주 사용되기도 함)
2. 하정공(夏亭公)의 7세손(世孫) 학암(鶴巖) 몽정(夢鼎)의 『壬辰日記』에 있음.
巖下小溪歸海意(암하소계귀해의)
庭前穉栢拂雲心(정전치백불운심)
바위 아래 작은 개울물은 바다로 가고 싶은 뜻을 가졌고,
뜰 아래 어린 잣나무는 구름을 휘어잡고 싶은 마음이 있네.

류관(柳寬)은 총기(聰氣)가 좋고 영민(英敏)하여 평생에 배운 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밤마다 글을 외우고 그 뜻을 생각하였다. 진덕박사(進德博士)에서 정승이 되기까지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그가 당(唐) 한유(韓愈)가 지은 「太學生 彈琴詩序(태학생 탄금시서)」를 인용하고 또 송태조(宋太祖)의 「賜脯故事(사포고사)」를 인용하면서 3월 3일과 9월 9일을 국경일로 삼아 높고 낮은 신하들로 하여금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게 하여 태평기상(太平氣像)을 상징하게 하십시오.라고 상소하니 세종이 좋다.고 윤허(允許)했다. 이것은 선비들을 대접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주는 제도인 것이다. 그는 박식(博識)하고 문장이 뛰어나서 『태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했고,『고려사』편찬 때 영수사관(領修史官)의 중임(重任)을 맡았다.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두니 그 절은 서울 사대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집은 동대문 밖에 있었으므로 늘 간편한 사모(紗帽)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다니기만 하고 수레나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
어떤 때는 어린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젊은 사람 몇을 이끌고 시(詩)를 읊으며 오가기도 하며 때로는 휘파람을 불며 소박하게 즐기기도 했다. 사람들은 정승 류관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의 아량에 탄복했다. 정승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흔히 사방에 논밭을 가지며 별장(別莊) 하나라도 있었지만 그에게 그런 것이라고는 애당초 있지 않았다. 동대문 밖에 있는 오두막과 같은 집에는 나무를 가로질러 놓은 문과 꽃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담을 쌓고 대문을 만들라고 권하면 그는 지금 정승이 됐다고 갑자기 지난날의 문을 고친다면 될 것인가? 베옷에 쑥대집도 황량하지 않다. 홀(笏)과 인끈, 수레와 높은 관(冠)도 영광스럽고 빛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벼슬에 이었지만 집은 동대문 밖에 있는 두어 칸 초당(草堂) 하나뿐이었으며 그마져 울타리도 없이 벌거숭인 채로 서 있었다.
류관은 역시 청빈한 사상을 듬뿍 담아서 자제들을 교육했다. 매양 그들에게 경계하기를 친구라면 당연히 돈을 융통하여 쓰는 것이 의리겠지만 삼가서 그러한 것은 요구하지 말라. 구했는데도 얻지 못하게 된다면 섭섭한 마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저쪽도 역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게 되어 사귀는 정이 이로부터 멀어지니 어찌 구하지 않았던 것과 같겠는가?고 했다.
그의 조카 류사눌(柳思訥)은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에 모친을 돌아가심에 고아가 되었다. 이를 숙부인 그가 데려다가 자기 자식같이 길러서 책 읽는 것, 그리고 힘써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성취하도록 하여 18세에 급제(及第)시켰다. 거느리고 있던 종을 나눌 때에는 조카를 마치 형과 같이 생각해서 수(數)를 더 많이 주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공평하고 청렴한 면모를 우러러 보았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에게 훈시자손서(訓示子孫書)에 이르기를 나의 신체발부(身體髮膚)의 외(外)엔 다 숙부(叔父)가 주신바라 너의 자(子)와 손(孫)3대(代)가 봉사(奉祀)함을 그치지 말라.하였다.
국가의 녹(祿)이나 음식, 반찬 등을 받을 때면 언제나 일가와 이웃들에게 나누어 먹도록 했다. 연로(年老)해지자 그는 죽을 때를 대비해서 뽕나무로 관(棺)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사촌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망설 없이 그 관을 보내 주었다.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집 둘레의 채마밭에 호미를 들고 들어가 김매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손님이 찾아오면 섬돌 위에 탁주 한 항아리를 올려놓고 사발을 술잔으로 삼아 늙은 여종을 시켜 술을 따르게 했고 이것도 두어 잔씩 돌아가면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것은 여느 시골의 평범한 농부의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 정승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후생을 교훈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 했다. 찾아오는 그들이 누구의 자제인지 묻는 법이 없고 성의를 다해 가르쳤으므로 그의 문하(門下)에는 학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입력: ryuj 09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