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관(柳輨), 삼희재공(三希齋公), Ryu, Gwan, 생몰년:1757-1845, 세:28
純祖朝 學行 府尹公派, 자 중운(仲運). 호 삼희재(三希齋).
문흥군 사원(文興君 思璟)의 8대손이요, 현감 덕유(縣監 德由)의 차자로 영조(英祖) 33년 T丑 12월 25일 고양(高陽)에서 태어났는데, 기질이 아름답고 눈빛이 빛나며 귀가 얼굴보다 희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었다.
4세에 취학함에 현감공(縣監公)이 무릎을 꾾고 앉도록 가르쳤는데 공께서 평생토록 다리를 펴거나 걸터 않음이 없었다. 6세에 현감공을 따라 정읍(井邑) 임소에 가서 광대들이 희롱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볼 것이 아니다』하고, 이로부터 다시는 예(禮)가 아닌것을 보지 않았다.
점점 자라 서전(書傳)을 읽으면서 기삼백(基三百) 주(註)에 이르러 깊이 생각하여 침식을 잊기 2일 만에 그 수리를 알았으며, 육경(六經)을 정독하여 말하듯 외웠다. 집이 본시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였으나 숙사(塾舍)에서 과업(科業)을 익히되 집에서 5리 거리인데도 굶주림을 참고 왕래하였다.
18세에 부친 상을 당하여 제반 절차에 정문(情文)을 갖추어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정조(正祖) 7년 癸卯(1783)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태학(太學)을 출입하였는데 지기(志氣)가 곧고 굳셈으로 아무리 사나운 사람이라도 공을 보고 오래되면 자신을 굴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조(遣視)께서 공의 사화(詞華)를 사랑하사 매양 응제(應製) 입대(入對)케 하고, 가인(家人)같이 여기어 때때로 반찬을 하사(下賜)하시었다.
23년 己末(1799) 12월에 반제(泮製)에 발탁되었는데 주상께서 동정귤(泂庭橋) 및 약어(藥魚)를 특별히 하사하시고 이르시기를 『너의 노모에게 공양하라』하시었다. 이듬해 정조(正祖)께서 승하하시니 공이 벼슬을 단념하고, 이조(吏曹)에서 거듭 참봉(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순조(純祖) 3년 癸亥(1803)에 모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심으로 공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드려 하루의 명을 연장하고 상을 당하여 슬픔이 과도하여 몇번이나 본성을 잃기에 이르렀었다.
공께서 문학이 유여하고 지조가 근칙하여 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일이면 반드시 시비를 명확히 분별하여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는데 앞장섯고, 한편 조용히 앉아 독서에 힘쓰니 식자(識者)들이 추중하여 마지 않았다.
헌종(憲宗) 9년 癸卯(1843)에 회방(回楞)으로 첨지중추부사 오위장(僉知中權府事 五衛將)에 제수되고 11년 乙巳 6월 14일 고양 백석(高陽 白石)에서 졸하니 향년 89세였다.
공께서 명(明)나라의 여러 사기(史記)를 모아 강목(網目)의 예를 모방하여 명사(明史)를, 정자(程子) , 주자(朱子) , 퇴계(退漢) , 율곡(栗谷) 등 제현의 말씀을 모아 척사정론(斥邪正論)을, 삼례(三禮)를 좋아하여 읽고 송(宋) , 명(明) 제유의 주례 주설(周禮 註說)을 모아 예설(禮說)을 저술하고, 또 성진(星辰)의 변화와 분야(分野)의 분별을 상고하여 혼천도(澤天圖)를, 산천(山川) 도리(道里) 해도(海島)의 풍기(風氣)를 고찰하여 곤여도(坤輿圖)를 각기 그렀으며, 또 시문산고(詩文散摘) 몇권이 있다.
그리고 교류(交遊)로는 대산 김매순(臺山金適淳) , 구우 김기서(邱隅 金基敍) , 거관재 심문영 (居觀齋 沈文永)으로 더불어 계의(契誼)가 매우 깊었다.
배위 연성이씨(蓮城李氏)는 진사 성간(進士聖簡)의 따님으로 1남 5녀를 두고 공보다 32년 먼저 순조(純祖) 13년 癸酉(1813)년에 돌아가시었다. 후에 고양군 사리대면 마위동(高湯郡 沙里大面 馬位洞)의 선비(先姒) 묘소 계하 임좌(壬坐)에 공과 부장으로 모셨다.
공께서 돌아가신 5년 후에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이 행장을 지었다.
아들 회풍(會澧)이 독실한 효행과 학문으로 고을선비들의 천장(薦狀)이 있었다. 따님은 고창오시흠(高敞吳始歆) , 광주이문복(廣州李文福) , 은진송흠준(恩津宋欽俊) , 전주이돈원(全州李敦元) , 연안이 필(延安李 珌)에게 출가하였다.
백부 도곡 집(道谷 輯)께서 무사(無諦)함으로 공께서 그 후로 출계하여 5남 4녀를 두어 3남 항(沆)을 생정(生庭)으로 입계시켰다.
공의 후손이 고양 백석(高陽 白石)에 세거하고 있으며, 언론인(言論人) 종석 류광열(種石 柳光烈)은 바로 공의 현손이다.
※ 梅山集, 甲子譜,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