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광수 (柳光秀)

류광수(柳光秀), 미제공(薇齊公), Ryu, Gwang-Soo, 생몰년 :?-?, 세:13
侍郞公派, 호 미재(薇齋)

공은 시랑 당(侍郞 溏)의 손이요, 낭장 송절(郎將 松節)의 장자이다.
음사(蔭仕)로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지냈는데,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청주 등등산(淸州 登登山)으로 물러나 살면서 학문에 전력하는 한편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재(冶隱 吉再)로 더불어 왕래하며 시부(詩賦)로써 여생을 즐겼다.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채소와 과일이며, 염장(鹽漿)을 먹지 않고 3년을 복상(服喪)하였다.
조선 건국(建國)초에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 함께 관직으로 부름을 받았은마 송악산(松嶽山)으로 들어가 채미가(採薇歌)를 부르고, 죽장망해〔竹杖芒(革圭)〕로 해주 수양산(海州 首陽山)에 들어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당을 참배하고 바로 문화 구월산(文化 九月山)으로 가서 대승공 묘소를 봉심(奉審)하고 광주(廣州) 옛집으로 돌아와 얼마 안되어 돌아기시니 청주 등등산 갑좌(甲坐)에 반장하였다.
공의 아우 광원(光遠)도 형을 따라 함께 남하(南下)하여 만년에 옥천 망덕산(沃川 望德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종매부(從妹夫) 룡암 김주(龍巖 金澍)가 매형 칭찬하기를 『이 형에 이 아우가 있으니 일문 충효(一門 忠孝)가 천추에 빛나리라』하였다.
배위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제학 문우(提學 文祐)의 따님으로 6남 1녀를 두고 돌아가시니 청주 등등산 공의 묘소에 합부(合祔)하였다.
아들에 이(荑)는 정종(定宗) 원년 己卯(1399)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신(莘_은 문소전직(文昭殿直)이요, 정(楨)은 봉례(奉禮)요, 총(叢)은 전직영동정(殿直令同正)이요, 추(樞)요, 근(芹)은 서령(署令)이며, 사위는 충순위 양관도(忠順衛 楊寬道)이다.
팔게변영인(八溪 卞榮寅)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으며, 戊辰(1988) 10월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나주 나갑주(羅州 羅鉀柱)가 지었다.
후손은 대체로 청주(淸州)를 중심으로 충청북도에 세거하고 있다.

※ 墓碣銘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