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계분(柳桂芬), 괴산공(槐山公), Ryu, Gye-Boon, 생몰년:1421-1480, 세:17
成宗朝 文臣 . 中門祇候使公派, 자 자형(自馨). 호 록균(綠筠).
의정부사인 사근(議政府舍人 士根)의 손이요 증이조참의 승순(贈吏曹參議 承順)의 아들로 세종(世宗) 3년 辛丑 12월에 태어났다.
공께서 일찌기 부친을 여의었으나 스스로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를 통달하더니 23년 辛酉(1441)에 생원 진사 양시(生員, 進士, 兩試)에 급제하고 단종(端宗) 원년 癸酉(1453)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宇)에 보직되었다가 바로 주서(注書)에 승진하였다.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섭정(攝政)하여 국사(國事)에 많은 조치가 있었는데 공께서 능히 그 직분을 수행하여 乙亥(1455)에 세조(世祖)가 등극함에 따라 정사원종훈(靖社原從勳)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승진하고 얼마 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더니 숙부 성원(叔父 誠源)의 단종 복위(端宗 復位)사건에 연좌되어 경상도 칠원현(慶尙道 漆原縣)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세조(世祖) 6년 庚辰(1460)에 사면(赦免)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시주(詩酒)로서 괴로운 심사를 달래며 록균어수(綠筠漁叟)라 자호(自號)하고 성리(聲利)와 외물(外物)에는 담담히 지내었다.
예종(睿宗) 원년 己丑(1469)에 다시 기용(起用)되어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재직 중 과시(科試)를 관장하여 생원 김괴(生員 金塊). 진사 한언(進士 韓堰)등 각기 백인(百人)씩을 선발하였다.
성종(成宗)께서 즉위하신 후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지내었다. 이에 앞서 조정의 의논이 공이 오랬동안 외처 (外處)에 유배되어 있었고, 또한 연령도 많아 관직을 견디지 못하리라 염려했는데 신기(神氣)가 밝고 용지(容止)가 단정하므로 모두 감탄하였다. 얼마 후 괴산군수(槐山郡守)로 나가 정사(政事)를 관대하고 공평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 편안하였다.
공께서 천성이 온아(溫雅)하고 근후(謹厚)하여 자신을 높여 남을 깔보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비굴하지 않았으며 항상 심지(心地)가 평탄하여 친척과 붕우를 대함에 한결 지성으로 일관하였고, 교류(交遊)한 이는 모두 일시(一時)의 명망있는 높은 관리들이었다.
성종(成宗) 11年 庚子 5月 괴산관아(槐山官衛)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였다.
배위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정주목사(定州牧使) 이(珥)의 따님으로 묘소는 지금 음성군 원서면 갈흘리 선영 좌변 자좌(陰城那 遠西面 葛蛇里 先塋 左邊 子坐)에 쌍분으로 모셔 있으며 공께서 돌아가신 이듬해 辛丑(1481) 3월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갈명(墓碣銘)은 당시 참찬 서하군 임원준(參贊 西河君 任元濾)이 지었다.
2남을 두어 인동(麟童)과 인종(麟種)이다.
장남 인동은 참봉(參奉)으로 재직중 성종(成宗) 6년 乙未(1475)에 문과(文科)에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郎)을 지냈으며, 2남 인종은 성종 3년 壬辰(1472)에 춘장 진사시(春場 進士試)에 장원(狀元)하고, 이어 11년 庚子(148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한림(輪林)을 거쳐 내직으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간(司諫),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조정량(吏曹正郎) 등을 지내고 외직으로 음성(陰城), 단양(丹陽), 공주(公州) 등의 수령(守令)을 지내었다.
이렇듯 양세(兩世)에 대과(大科)로 문벌(門閥)을 떨쳤으나 후손이 미약하여 거의 무후한 실태이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國朝榜目. 號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