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계조 (柳繼祖), 문화군(文化君), Ryu, Gye-Jo, 생몰년: 1333-1374, 세: 13,
高麗 恭愍王朝 功臣
온정공 인기(溫靖公 仁琦)의 손이요, 밀직사대언 보발(密直司代言 甫發)의 차자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癸酉 6월 15일에 태어나 문음(門蔭)으로 충목왕(忠穆王) 2년 丙戌(1346) 11월에 선은관직(宣恩館直)에 제수되니 당시 14세였다.
공민왕(恭愍王) 3년 甲午(1354) 4월에 대전보마배행수(大殿寶馬陪行首)로 비순위호군(備巡衛護軍)에 승진되었더니 5년 丙申(1356) 5월에 우중금지유(右中禁指喩)로 흥위군보승섭호군(興威軍保勝攝護軍)에 임명되고, 7월에 흥위위보승낭장(與威衛保勝郎將)에 승진하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8년 己亥(1359) 12월에 홍건적(紅巾賊)의 위평장모거경(僞平章 毛居敬)이 군사 사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錄江)을 건너 평양(平壤)을 침공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태평하여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지 않고 있던 중 홍건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이 서경군민만호부 삼령도천호(西京軍民萬戶府 三領都千戶)에 제수되어 시중 경천흥(侍中 慶千興)과 함께 힘을 다하여 적들을 남김없이 무찔렀다. 이로서 안사일등공신(安祉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벽상(壁上)에 초상(肖像)을 그려 걸게하는 은전(恩典)을 입었는데 당시 공의 나이 27세였다.
9년 庚子(1360) 3월에 상서좌승지(尙書左承旨)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2월에 홍건적의 위평장 반성(潘誠)등이 군사 이십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도성(都城)인 개성(開城)을 함락하였다. 마침내 왕은 피란길에 오르고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기 이를데 없었다. 공께서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출전, 적병을 크게 쳐부수고 개성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전장에서 습득한 황제(皇帝)의 옥새(玉璽)와 금은동인(金銀銅印)등의 보물을 천자(天子)에게 바치었다. 이로서 다시 안사일등공신에 책록되니 때에 공의 나이 30세였다.
이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거쳐 공주도병마사(公州都兵馬使)로 나갔다.
12년 癸卯(1363) 3월, 찬성사 정용(贊成事 鄭鏞)이역모를 꾀하여 국가의 사직이 위기일발에 처했는데 공께서 최영(崔瑩)과 함께 전장에 다달아 역적들을 소탕하고 종사(宗社)를 다시 편안케 하니 다시 안사일등공신에 책록되고 도형벽상(圖刑壁上)의 은전을 입음과 아울러 밀직사우부대언 지예부사(密直司右副代言 知禮部事)에 제수되었다. 동년 6월에 순성좌명공신(純誠佐命功臣)에 책록됨과 동시에 전법판서 상호군(典法判書 上護軍)에 승진되었다.
동년 12월,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공이 이르기를『지난 辛丑년 가을, 전장에서 말 안장에 앉은지 20여일이 지난 후 허리 밑이 가려워 손으로 문지르니 이(?)가 한줌 잡히었다. 그때 말 위에서 잠을 자서 냉기로 인하여 고질(瘤疾)이 되었으니 내가 오래 살지 못할것이다.』하였다. 그리고 이 뜻으로 사직소(辭職疏)를 올렸 왕이 슬피하며 허락하였다.
그 뒤 마침 병이 완쾌되어 별장(別莊)에서 지내면서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고 조석으로 빠짐없이 문안(問安)을 드렸다.
15년 丙午(1366) 12월 왕이 공의 전공(前功)을 생각하고 전직(前職)을 제수하였다. 그후 각부의 판서(判書)를 거쳐 20년 辛亥(1371)에 판개성윤(判開城尹)에 제수되었다. 22년 癸丑(1373)에 세력있는 내시(內侍)의 미움을 받아 파직 당하고, 이듬해 9월 복직되어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 上護軍)에 제수되고 공신호(功臣號)는 전과 같았다.
그로부터 석달후 12월 17일에 돌아가시니 때는 공민왕 23년 甲寅으로 향년 42세였다.
이듬해 2월 3일에 장단 대덕산 복성동(長湍 大德山 福星洞)에 안장되었다.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아들 우의정 양(右識政亮)의 귀히 됨으로 인하여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됨과 아울러 문화군(文化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배위 혜순택주 능성구씨(惠順宅主 綾城具氏)는 면성군 영검(沔城君 榮儉)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다.
장자 신(信)은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내시원사(內恃院事)를 거쳐 부윤(府尹)에 이르고, 차자 양(亮)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시호 충경공(忠景公)이요, 3자 순(恂)은 사선직장(司膳直長)을 거쳐 판사(判事)에 이르렀으며, 사위는 장군 안동권정주(將軍 安東權定柱性)이다.
묘소가 실전되어, 지난 丙寅(1986) 가을에 양주군 와부면 시우리(楊州郡瓦阜面時雨里)에 소재한 아들 충경공의 묘소아래 재실(齋室) 옆에다 공의 조 온정공(祖溫靖公) 부 대언공(父 代言公)과 함께 삼대(三代)를 설단하여 매년 단사(壇祀)를 행하고 있다.
※高麗史, 墓誌銘, 嘉靖譜.
[입력: ryuj 09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