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계문 (柳季聞), 안숙공(安肅公), Ryu, Gye-Moon, 생몰년: 1383-1445, 세: 14,
世宗朝 文臣, 夏亭公派, 자 숙행(叔行).
하정 관(夏亭 寬)의 3자로 고려 우왕(禑王) 9년 癸亥에 출생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7년 丁亥(1407)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刑曺正郞),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지형조사(知刑曹事) ․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 예조참의(禮曹參議)를 두루 역임하였다.
세종(世宗) 8년 丙午(1426) 4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관찰사의 관(觀)자가 부친의 이름자라 하여 부임을 사양하니, 세종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특명으로 하정공의 이름을 관 (寬)자로 고쳐 주시고 공을 부임토록 하였다.
이듬해 10월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고,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 ․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2년 庚戌(1430) 11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옮기고, 얼마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
17년 乙卯(1435) 6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더니 19년 丁巳(1437) 6월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전보되어 동년 9월 정조사(正朝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하여 8월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21년 己未(1439) 10월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고, 23년 幸酉(1441) 3월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전임했더니 곧바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전직하여, 4월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9월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고 11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하였다.
25년 癸亥(1443) 정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가 재임중, 주상께서 연희궁(衍禧宮)으로 이어(移御)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차 행궁(行宮)으로 오던 도중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돌아가시니 때는 세종 27년 乙丑 정월 초2일로 향년 63세였다.
주상께서 2일간 조회(朝會)를 거두고 부의를 내림과 동시에 안숙공(安肅公)의 시호를 내리시고, 한달후 2월 초3일에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치제(致祭)하시었다.
공은 성품이 너그러워 조그마한 일에 구애하지 않았으며 특히 필법(筆法)이 절묘하여 주상의 특명으로 법화경(法華經)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문(詩文)에 능하여 목천(本川) , 연안(延安) , 백천(白川) , 경성(鏡城) 고을을 지내면서 지은 제영(題詠)과 재령 전덕루(載寧 全德樓) , 강릉 한송정(江陵 寒松亭)의 시(詩)등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고 있다.
배위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부사 수량(府使 守良)의 따님으로 6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권(?)은 문과에 급제, 병조참판(兵曹參判)이요, 보(䀯)는 종성부사(鐘城府使)요, 환(睆)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요, 정(?)은 회령부사(會寧府使)요, 제(睇)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요, 조(眺)는 감찰(監察)이며, 사위는 판관 이상로(判官 李尙老) , 증병조참의 청주정유(贈兵曹參議 淸州郵濡) , 목사 순창조욱(牧使 淳昌趙頊)이다.
공의 묘소는 광주 세촌(廣州 細村), 지금 성남시 복정동(城南市 福井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모셔있다.
甲子(1984) 5월 묘소에서 뒷편 도로변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금암 성구용(錦庵 成九鏞)이 짓고, 글씨는 방후손(傍後孫) 하촌 인식(夏村 寅植)이 썼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 畵晝考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