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계선(柳繼先), 평양공(平壤公), Ryu, Gye-Seon, 생몰년: ?-?, 세:18
燕山朝 蔭佺. 左相公派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손이요, 사과 헌(司果 軒)의 아들이요, 호군 강릉김의온(護軍 江陵金義溫)의 외손이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조부 서산공께서 절의(節義)를 지켜 해주 수양산(海州 首陽山)으로 들어가신 후 부친 사과공이 처향(妻鄕)으로 이거하신 때문에 공께서 외가(外家)인 파주 장계(坡州 長溪)에서 성장하였다.
공께서 아름다운 자질(資質)을 타고나 성품이 매우 총명하더니 정훈(庭訓)을 굳이 지켜 말이 더욱 준엄하고 행동이 더욱 독실하여 보통 아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향리에서 모두 『서산공이 훌륭한 손자를 두었다』고 칭송하였다.
장성하여 문음(門蔭)으로 출사(出仕), 여러 고을 수령(守令)을 거쳐 평양판관(平壤判官)에 이르렀는데 항시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이 날로 심하여 온갖 비행(非行)이 이루 말할 수 없고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닿았었다. 이른바 채청사(採靑使) 채홍사(採紅使)라는 관원을 팔도(八道)에 파송하여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와 품질이 좋은 마필(馬匹)을 마구 징발하였는데 이에 불응했다는 죄목으로 丙寅(1506) 6월에 진주목사 이승원(晋州牧使 李承元) , 합천군수 박항(陜川郡守 朴恒) , 정주판관 김여영(定州判官 金麗英) , 영변판관 한윤(寧邊判官 韓倫) , 안주목사 윤흥신(安州牧使 尹興莘 ) , 평양판관 류계선(平壞判官 柳繼先) , 거제현령 금치함(巨濟縣令 琴致諴) , 성천부사 정극인(成川府使 鄭克仁) , 울산군수 이계의(蔚山郡守 李繼義) , 경주부윤 예충년(慶州府尹 芮忠年) , 강서현령 정계함(江西縣令 鄭啓誠)등 11인이 동일(同日)에 하옥(下獄)되었다.
석달후 9월에 반정(反正)이 일어나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즉시 방면(放免), 복직(復職)되었으나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여 취임하지 않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간호에 지성을 다하다가 마침내 상(喪)을 당하자 예제(禮制)를 쫒아 복(服)을 마쳤다. 한편 모친을 극진히 모시면서 혹 휘일(諱日)을 당하면 슬픔을 다하여 고인(古人)의 영척지훈(寧戚之訓)을 실천하였다.
배위 공인 전의이씨(恭人 全義李氏)는 병조참판 양호공 병정(兵曹參判 襄胡公 秉正)의 따님으로 1남을 두어 완(琬)은 음사(蔭仕)로 사직(司直)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는데 아전(衙前)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흠모하여 마지 않았다. 완(琬)의 배위 보성선씨(寶城宣氏)는 주부 팽손(主簿 彭孫)의 따님인데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순장(順長)은 감찰(監察)이요, 2남은 순덕(順德)이요, 3남 순명(順命)은 홍주목사(洪州牧使)요, 4남은 순경(順敬)이며, 사위는 주부 해평윤정언(主簿 海平尹貞彦)이니 즉 영의정윤은보(領議政 尹殷補)의 아들이다.
판관공의 묘소는 지금 파주군 문산읍 내포리 장계 후록 경좌원(坡州郡汶山邑內浦里 長溪 後麓 庚坐原)에합폄(合窆)으로 석의(石儀)가 갖추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마멸된지라 戊辰(1988) 3월에 석의(石儀)를 개수(改竪)하였다.
월성정동휘(月城鄭東輝)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명에 이르기를
『세상이 흔돈하여 몸이 위태로왔으나 때가 바라져 관작이 회복되었도다. 서산 선생을 계술하는데 공이아니고 누구이겠는가? 』
<世濕身危時正官複繼述西山匯公而孰>
후손은 광산(光山). 라주(羅州). 장성(長城). 화순(和順). 영암(靈岩). 여주(驪州). 이천(利川)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嘉靖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