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 (柳璥), 문정공(文正公), Ryu Gyeong, 생몰년: 1211-1289, 세: 9
자 천년(天年), 또는 장지(藏之).
공은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의 손이요, 복야공 택(僕射公 澤)의 아들로서 희종(熙宗) 7년(1211)생이다.
고종조(高宗朝)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45년 (1258) 3월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 재직 중, 김 준(金 俊) 등과 함께 당시의 세도가(勢道家)인 최의(崔竩)를 죽이어, 정권을 왕실(王室)에 회복시키고 60년 동안 끌어오던 최씨 세도를 꺽고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종식시켰다.
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 등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도다.」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을 제수하시고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 일등(一等)에 책록함과 동시에 많은 전토(田土)를 하사하였다.
46년 (1259) 봄에 유주(儒州) 고을을 위사공신 류 경의 고향이라 하여 현(縣)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문화(文化)로 개칭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동년 4월에 고종께서 병이 위독하심에 공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여 6월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원종(元宗) 3년(1262)에 도형벽상(圖形壁上)의 은전(恩典)을 내리고 이듬해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守太傅 參知政事 太子太保)로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승진되었다.
충렬왕(忠烈王) 2년(1276) 7월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감수국사(監修國史),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승진되고 이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고, 또 감수국사로서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수하였다.
4년 (1278) 2월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겸하고 10월에 사직표문(辭職表文)을 올렸는데 왕이 허락치 않고 오히려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진시킴에 다시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15년(1289) 향년 79세로 돌아가시니 왕이 크게 슬퍼하시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내리셨다.
공께서 본래 체구가 작고 비대하였는데 인품이 방정하여 바라볼수록 엄연하였으며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도량이 넓고 깊었다. 대사를 결단하고 사람을 대함에 관대할 뿐 아니라 지감(知鑑)이 있어 명신인 원부(元傅) · 허공(許珙) 등은 모두 공의 천거로 등용된 인물이다.
일찍이 사관(史館)을 거느리고 신종(神宗) · 희종(熙宗) · 강종(康宗) · 고종(高宗) 사조(四朝)의 실록을 편찬하고, 국자시 및 과시(科試)를 네 차례 관장하였는데 그 때마다 문장을 논함에 체재(體裁)를 먼저 취하고 공졸(工拙)을 뒤로 쳐서 훌륭한 선비들을 선발하였으니 이른바 이존비(李尊庇) · 안향(安珦) · 안진(安진) · 이혼(李混) 등의 명사가 모두 공의 문생(門生)이었다.
공의 사직표문 및 시 등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한다.
공의 묘소는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 종개천(長湍郡 津西面 田齋里 鍾開川) 선영 외국 자좌원(先塋 外局 子坐原)에 모셔 있다. 고종 3년(1866) 2월에 묘비를 개수하였는데 이조참판 달성 서승보(吏曹參判 達城 徐承輔)가 비문을 짓고 이조참판 연일 정해상(吏曹參判 延日 鄭海尙)이 비문을 썼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입력: JR 09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