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인 (柳敬仁)

류경인 (柳敬仁), 박사공(博士公), Ryu, Gyeong-In, 생몰년: ?-?, 세:19
中宗朝 文臣. 左相公派, 자 안중(安仲)

증영의정 사공 (贈領議政 思恭)의 증손이요, 울산부사 위(蔚山府使 渭)의 손이요, 금구현령 응상(金溝縣令 應祥)의 장자이다. 연산군(燕山君) 10년 甲子(1504)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중종(中宗) 30년 乙未(15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로 재직중 당시의 명사(名士)인 진우(陣宇). 김희년(金禧年). 정사현(鄭思顯)으로 더불어 명망(名望)이 높았다.
공이 본래 정직하고 사특함이 없어 의리(義理)를 스스로 지켰으며 문사(文辭)가 화려하고 언어(言語)가 고명하였다. 그런데 당시 척리(戚吏)가 정사(政事)를 농간함을 보고 마음으로 항상 불쾌히 여기더니 32년 丁酉(1537)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재직중 상소(上疏)로서 김안로(金安老)를 배척하다가 도리어 무고(誣告)를 입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돌아가시었다.
배위 죽산안씨(竹山安氏)는 1남 1녀를 두고 졸하니 포천 광현 자좌(抱川 廣峴 子坐)에 고위(考位)와 쌍분하였다.
아들 해(亥)는 진사(進士)이며, 따님은 고성이정려(固城李精黎)에게 출가하였다.
후손은 양주군 화도면 마석우리(楊州郡 和道面 磨石隅里)에 세거(世居)하였으나 지금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冠岳區 奉天洞). 의정부시 가릉동(議政府市 訶陵洞)등, 주로 서울 근방에 살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