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집(柳景緝), 감사공(監司公), Ryu, Gyeong-Jip, 생몰년:1587-1656, 세:22
仁祖朝 文臣. 左相公派, 자 술보(述甫).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7대손이요, 판관 인(判官 ?)의 2자로 선조(宣祖) 20년 丁亥 2월 2일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임진왜란을 만나 난리를 피하여 유리(流離) 하다가 14세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학업이 날로 진취하더니 광해군(光海君) 4년 壬子(161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의논이 크게 일어나자. 동지로 더불어 항소(抗疏)를 올려 그 부당함을 극구 간하였다. 한편 수몽 정엽(守夢 鄭曄)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재임시 공께서 재임 (齋任)이 되어 경서(經書)중에 어려운 뜻을 진지하게 물으니 수몽이 공의 정밀하고 민첩함을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인조(仁祖) 2년 甲子(1624)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저작(著作) , 박사(博士) , 성균관(成埼館)의 전적(典籍) , 직강(直講) · 예조좌랑(禮曹佐郞) , 병조정랑(兵曹正郞) ,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집의(執義) , 시강원(侍講院)의 사서 (司書) , 필선(弼善) , 보덕(補德) , 군자감(軍資監) , 사복시(司僕寺) , 예빈시(禮賓寺)의 정(正) · 통례원상례 (通禮院相禮) ,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승지(左承旨) , 형조(刑曹)와 병조(兵曹)의 참의 (參議) ,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의 내직과,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 백천군수(白川郡守) , 강릉(江陵)과 종성(鐘城)의 부사(府使) , 홍주목사(洪州牧使) , 황해도(黃海道)와 강원도(江原適)의 관찰사(觀察使) 등 외직을 두루 역임 하였다.
일찌기 충청도경차관(忠淸道敬差官)으로 나가 청양현(靑陽縣)의 옥사(獄事)를 다스렸는데 권세에 흔들리지 않고 잔약한 백성의 원통함을 분별 처리하였으며, 또 보덕(補德)으로 재직중에 세자(世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들어가 제반 의절(儀節)을 능히 처리하므로 일행들이 감복하여 마지 않았다.
공은 천품이 돈후(敦厚)하고 행실이 독실(篤寶)하여 80고령의 양친(兩親)을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더니 거듭 대고(大故)를 당하여 6년을 여묘(廬墓)하여 날마다 세차례씩 배곡(拜哭)함에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백씨(伯氏)께서 먼저 돌아가심에 형수(兄嫂)와 종자(從子)들을 공경과 사랑으로 대하고 계씨(季氏)로 더불어 늙도록 거처를 함께하며 우애가 독실하였다.
관직에 있어 청렴을 스스로 힘써 자신은 검소하고 백성들을 윤택하게 하므로 임기가 거의 됨에 관고(官庫)가 가득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공적을 칭송하고, 나라에서는 포상(褒賞)을 내리었다. 또한 집에 있어서는 양식이 자주 떨어졌으나 마음은 항상 편안하였고, 집이 퇴락하였으나 수리하지 않았으며,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게으른 빛이 일체 없었다. 그리고 자질들을 가르침에 반드시 공손하고 검소함을 위주하고 사람을 접대함에 온화하고 공경함을 일관하여 일찌기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교류(交遊)를 좋아하지 않아 문밖을 나섬이 드물었는데, 역신 김자점(逆臣 金自點)이 바로 이웃에 살아 서로 내왕하다가 그가 국권(國灌)을 잡고 날뛰는 것을 보고는 그로부터 절교(絶交)하여 그가 연회(宴會)를 베풀어 간곡히 초청하여도 가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지조가 굳고 지론이 곧으므로 식견(識見)있는 이들이 모두 장자(長者)라 칭송하였다.
효종(孝宗) 7년 丙申 5월 8일에 향년 70세로 돌아가시니 왕이 관리를 보내어 치전(致奠)을 명하시었다.
배위 전의이씨(全義李氏)는 호군 위(護軍 韡)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갖추어 구고(舅姑)를 섬기고 부군(夫君)을 받드는데 유감이 없었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어 아들은 호군 신(護軍 珅) , 화(琫) , 평(坪) , 변(?) , 사평 사(司評 ?)이며, 사위는 좌랑 전주최계형(佐郎 全州崔繼亨) , 관찰사 한산이태연(觀察使 韓山李泰淵) , 찰방 안급(察訪 安級)이다. 그리고 서출에 2남 5녀를 두어 아들 상(瑞)은 숙종조(肅宗朝)에 명의 (名醫)로서 일국에 명망을 떨치고 아홉 고을 관장(官長)을 지낸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품계에올랐고, 장(璋)은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사위는 만호 이지현(萬戶 李知賢) , 진사 신우징(進士 申遇澄) , 정중명(鄭重鳴) , 정익상(鄭翊相) , 첨지 신석백(僉知 辛錫百)이다.
현종(顯宗) 7년 丙午(1666) 9월에 현재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廣州郡 五浦面 新?里) 추령목곡 묘좌(楸嶺木谷 卯坐)에 배위 이씨와 합부하고 묘비를 세웠는데 묘표는 대제학 외재 이단하(大提學 畏齋 李端夏)가 짓고, 비문은 청평위 심익현(靑平尉 沈益顯)이 썼다.
후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되었다.
※ 朝鮮王朝實錄, 墓表, 丁巳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