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조(柳敬祖), 참의공(參議公), Ryu, Gyeong-Jo, 생몰년:1461-1548, 세:16
中宗朝 文臣. 文肅公派, 자 윤보(胤甫)
월곶첨사 갱생(月串僉使 更生)의 장자로 세조(世祖) 7년 辛巳 8월 22일 생인데, 일찌기 모친을 여의고 장년(壯年)에 부친을 여의었다.
공께서 항상 봉록(俸祿)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애통히 여기고 복제(服制)를 마친후 사당(祠堂)을 짓고, 제기(祭器)를 따로 비치하며 제장(祭醬)을 따로 옹기에 담아 저장하고 제사(祭祀)에 쓸 곡식을 따로 간수하였으며, 제사를 당하면 아들들을 거느리고 외방(外房)에서 재숙(齋宿)하고 제찬(祭饌)외에 남은 음식도 제사 전에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새벽에 의관(衣冠)을 갖추고 사당(祠堂)을 배알(拜謁)하길 늙도록 폐하지 않았다.
46세 되던 중종(中宗) 원년 丙寅(1506)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좌랑(佐郞) , 직강(直講) , 정랑(正郞)등을 거쳐 丁丑(1517)에 함경도도사(咸鏡道部事)로 나갔다가 얼마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제수되었다.
일찌기 구월산(九月山)을 지나다가 시조 대승공(大丞公)의 묘소를 성소(省掃)하고, 이어 고조 의정공(高祖 議政公)묘소를 배알하고, 중종(中宗) 20년 乙酉(1525) 8월에는 증조 전농공(曾視 典農公)의 비문을 지어 묘비를 세웠다.
25년 庚寅(1530)에 사섬시부정(司瞻寺訓正) ,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영월부사(寧越府使)로 나갔는데 관찰사(觀察使)가 비리(非理)로 영(令)을 내리자 공께서 강직함을 지켜 아부하지 않다가 비록 파직을 당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후 호군(護軍)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겸하고 39년 甲辰(1544) 4월, 당시 84세의 고령으로 상소(上疏)를 올려 치국대도(治國大道)를 권하니 왕께서 그 노신(老臣)으로서 임금을 깨우침을 가상히 여기고 표리(表裏) 한벌을 하사(下賜)하시었다.
조상을 섬기는 성의가 유독 뛰어나 만년(晩年)에 선세(先世)의 묘소를 수축(修築)하는데 시일에 구애하지 않으므로, 가인(家人)이 고총(古塚)의 동토(動土)에 난색을 표하자, 공이 한말로 거절하고 말씀하기를 『자손이 조상의 허술한 묘소를 수축하는데 조상께서 어찌 그 자손을 허물하했는가?』 하시고 기어이 실행하였다.
명종(明宗) 3년 戊申 7월 4일 돌아가시니 향년 88세로 부평군 월곶면 고잔리, 봉수산 선영 계하 신좌(富平郡 月串面 高棧里 烽燧山 先塋 階下 辛坐)에 묻히셨다.
손자 형조정랑 덕종(刑曹正郎 德種)이 행장(行狀)을 짖고, 족후손 비서원승 인철(?書院丞 寅哲)이 묘갈명 (墓碣銘)을 지었다.
배위는 두분으로 양주조씨(楊州趙氏)와 부여서씨(扶餘徐氏) 저(渚)의 따님인데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석(永錫) , 문석(文錫)이요, 사위는 김주(金鑄). 김환(金環)이다.
후손은 주로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북도(忠淸北道)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行狀, 墓碣銘.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