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생 (柳更生)

류경생 (柳更生), 첨사공(僉使公), Ryu, Gyeong-Seang, 생몰년: 1426-1491, 世 : 15

祖父 충장공(忠莊公) 류림(柳臨)
공(公)의 자(字)는 복원(復元)이요 호(號)는 현리(玄理)니 문숙공(文肅公) 사눌(思訥)의 제삼자(第三子)라. 비(妣)는 둘이니 정부인(貞夫人) 강릉유씨(江陵劉氏)는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창(敞)의 여(女)요,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군수(郡守) 습(習)의 여(女)니라. 공(公)은 성씨(成氏)의 소생인데 일찍 부친(父親)을 여의고 모친(母親)을 의지하여 자라서 백씨(伯氏) 중씨(仲氏) 두형과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기장(機張)과 흡곡현령(歙谷縣令)을 역임하고 월관첨사(月串僉使)가 되니 이때에 왕(王)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윤계겸(尹繼謙)에게 하서(下書)하고 전유(傳諭)하여 가상(嘉賞)하고 돌아가심에 이르러 병조참판(兵曹叅判)을 증직(贈職)하다.
공(公)의 성품이 엄하고 위엄이 중하여 여러 아들을 가르치되 급제(及第)하기 전에는 말을 타지 못하게 하고 그 재주 없는 이는 우하(牛下)를 소제하게 하고 동복(僮僕)을 다스리되 그 정(情)을 힘써 다해서 위엄과 은혜를 함께하니 아랫 사람이 감히 속이지 못하더라.
공(公)이 지기(志氣)가 확고하고 충의(忠義)와 재용(材勇)이 족(足)히 국가(國家)에 간성(干城)이 될 만하되 낮은 벼슬에 머물렀으니 날개의 한정대로 날지 못한것 같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왕(王)의 한말씀의 표창이 또한 천추(千秋)에 거울 삼을지니 돌아보건대 썩은 붓으로 어찌 감히 쓸데없는 말을 더 하리요. 생졸(生卒)과 이력(履歷)은 다 잃어버려서 전하지 아니하다.
배(配)는 증정부인인천리씨(贈貞夫人仁川李氏)니 안정공(安靖公) 효상(孝常)의 여(女)로 묘(墓)는 부(祔)하다. 남(男) 경조(敬祖)는 문과(文科)에 급제 참의(叅議)요, 경종(敬宗)이다. 참의(叅議)의 남(男)은 영석(永錫)이니 선교랑(宣敎郞)이요, 희석(熙錫)은 감찰(監察)이요 문석(文錫)이요 경종(敬宗)의 남(男)은 천석(天錫)이니 아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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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 양주 팔현동
※ 무자보, 月串僉使柳公(更生)墓碣銘

[입력: ryuj 14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