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소(柳景紹), 이천공(利川公), Ryu, Gyeong-So, 생몰년:1596-1666, 세:22
仁祖朝 蔭仕, 左相公派, 자 이술(而述)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7대손이요, 한성부판관 인(漢城府判官 ?)의 3자로 선조(宣祖) 29년 丙申 5월 19일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성동(成童)이 못되어 향시(鄕試)에 응시, 시권(試券)을 쓰는데 구경하는 이가 담처럼 애워싸고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어느날 여러 아이들과 함께 길에서 노는데 종이 뭉치를 가지고 지나는 이가 있어 공의 이름이 그 가운데 적혀 있었으나 공은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태연함이 평상시와 같으므로 듣는 이마다 큰 인물이 될것으로 짐작하였다.
나이 28세 되던 인조(仁祖) 원년 癸亥(1623)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이듬해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문음(門蔭)으로 직장(直長) , 주부(主簿)를 거쳐 호조좌랑(戶曹佐郎)에 옮겼다가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갔더니 얼마 후 양친상(兩親喪)을 거듭 당하여 중형(仲兄)으로 더불어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다시 관직에 불리어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 ,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흡곡현령(歙谷縣令) , 여산(礪山) , 고양(高陽) , 재령(載寧)의 군수(郡守) , 형조정랑(刑曹正郎) , 교하현감(交河縣監) , 공조정랑(工曹正郎) 이천부사(利川府使) , 강화부경력(江華府經歷)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전후로 법도를 지켜 선정 (善政)을 베푸니 체임후에 비를 세워 칭송한곳이 다섯 고을이었고 또한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포계(褻啓)가 있었다.
일찌기 친상을 마친 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경서(經書)에 전공(前功)이 있으니 다시 과거에 응시하게나,』하였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전에 대과(大科)에 낙제하여 낙심하던 부모의 정경(情境)을 생각하면 차마 말하지 못하겠는데 금일에 누구를 위하여 다시 영화(榮華)를 꾀하겠는가?』하고 물리쳤다.
기일(忌日)을 만나면 채소를 먹고 슬피 사모하여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두 형으로 더불어 우애가 돈독할 뿐 아니라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현종(顯宗) 7년 丙午 11월 21일에 향년 71세로 돌아가시었다.
배위 여주이씨(驪州李氏)는 현감 대준(縣監 大?)의 따님으로 공과 동년생인데 1남 5녀를 두고 공보다 16년 먼저 돌아가시었다.
아들 필(璋)은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서 숙종(肅宗) 6년 庚申(1680)에 보사원종훈(保社原從勳)에 책록되고,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사위는 현감 이지원(縣監 李志遠) , 김만헌(金萬憲) · 정언 안숙(正言 安塾) , 홍수원(洪壽元) , 대구서문혁(大邱徐文赫)이다. 그리고 서출에 아들 간(玕)과 사위 김하중(金夏重)이 있었다.
공의 장자 필(瑋)의 원종훈으로 말미암아 공에게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추증(追贈)이 있었다.
묘소는 고양군 사리대면 고군리(高陽郡 沙里大面 古郡里) 경좌(廉坐) 언덕에 모셔있다. 숙종(肅宗) 11년 乙丑(1685) 10월에 묘비를 세웠는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묘표를 지었다.
후손은 중원군 살미면 용천리(中原郡 乷味面 龍川里) · 엄정면 괴동리(嚴政面 槐東里) ,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陰城郡 甘谷面 五香里) ,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驪州郡 北內面 注岩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墓表.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