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함 (柳涵)

류함(柳涵), 백천공(百泉公), Ryu, Ham, 생몰년:1576-1661, 세:19
仁祖朝 學行. 檢漢城公派, 자 자정(子淨). 호 백천(百泉)

양근군사 선(楊根郡事 善)의 5대손이요, 열역재 덕용(悅易齋 德容)의 3자로 선조(宣祖) 9년 丙子 정월 3일생인데 천성이 엄중하고 학식이 굉박하며 행동이 절도가 있어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고령(高齡)의 양친(兩親)을 모시면서 지체(志體)의 봉양을 다하였다.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 호란(胡亂)에 참봉 조수성(參奉 曺守誠)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고자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니 열흘 남짖에 병사(兵士)가 수천명, 군량(軍糧)이 수백석에 이르렀다. 밤을 도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군하는 도중 청주(淸州)에 이르러 의병장(義兵將) 운암 이흥발(雲巖 李興浡)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맹서하고 적과 싸우다가 화전(和戰)성립의 소식을 듣고 북향(北向)통곡한 후 화순(和順)으로 돌아와 서암산(瑞巖山)에다 환산정(環山亭)을 짓고 그곳에 소요하며 시서(詩書)로 여년을 마치었다. 공의 시(詩) 일절(一絶)에 <나뭇잎 위에 춘추(春秋)는 갑자(甲子)를 망각하고 마음속에 일월(日月)은 황명(皇命)을 보전하도다.>하였으니 가히 공의 뜻을 알겠도다. 특히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하곡 허 봉(荷谷 許 篈)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심하니 고을에서 향선생(鄕先生)으로 추중하였다.
현종(顯宗) 2년 辛丑 정월18일, 향년 86세로 돌아가시니 화순 흑토치(和順 黑土峙)에 장례를 모셨다가 후에 구수동 후록 유좌(九水洞 後麓 酉坐)에 이장하였다.
배위 창녕조씨(昌寧曺氏)는 도사(都事) 정곡 대중(鼎谷 大中)의 따님으로 묘소는 합부(合駙)하였다.
5남 3녀를 두어 아들은 지성(之性). 지기(之起). 지서(之瑞). 지화(之和). 지혜(之惠)인데 모두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사위는 별제 진주정 직(別提 晋州鄭 稷), 이 파(李 坡). 정광형(鄭光亨)이다.
공의 시문(時文)이 병란(兵亂)에 거의 유실되고 약간 남아 전하고 있으며, 묘갈명은 장흥부사(長興府使) 청전 이학래(靑田 李鶴來)가 지었다.
화순 언동사(和順 彦洞祠)에 배향되어 매년 향사하고 있으며, 후손은 대체로 화순군 동면 언도리(和順郡 東面 彦道里)에 세거하고 있다.
※ 幕碍銘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