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함 (柳涵)

류함(柳涵), 백천공(百泉公), Ryu, Ham, 생몰년:1576-1661, 세:19
仁祖朝 學行. 檢漢城公派, 자 자정(子淨). 호 백천(百泉)
병자호란 화순의병 맹주(丙子胡亂和順義兵盟主)

류함(柳涵 1576-1661) 본관(本貫) 문화(文化), 자(字) 자정(子靜), 호 백천(百泉)으로 열역재(悅易齋) 류덕용(柳德容)의 삼남(三男)이다.
공(公)은 병자(丙子) 1576년 정월 초3일에 풍양(豐壤) 지금의 양주(楊州) 관동정사(官洞精舍)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남달랐고 자라서는 더욱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우아한 성품은 침잠(沈潛)하여 희로(喜怒)를 드러내지 않고, 의지(意志)와 기개(氣槪)는 단정(端正)하고 엄중(嚴重)하여 행동거지가 변함이 없었다. 선고(先考)의 명(命)에 따라서 명예와 이익을 신발 벗듯이 하고 털끝만 한 욕심도 다스리며, 도의로써 자신을 규율하는 신표(信標)로 삼고, 충효(忠孝)를 대대로 전할 보물로 여겼다.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중부(仲父) 교리공(校理公) 휘 덕수(德粹)의 참변을 겪고 나서 과거(科擧) 응시를 외면하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 탐구에 전심하고 영재(英才)들을 교육하였다. 당대 문장가였던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고 이기(理氣)로 문답하여 일찍이 <사서설(四書說)>을 남겼다. 공(公)의 시문(詩文)은 “낙하절창(洛下絶唱)이요, 남중독보(南中獨步)”라고 평을 받을 정도로 단아하고 진솔하였다. 도백(道伯)과 어사(御史)의 천거(薦擧)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처사(處士)로 지내던 공은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백형 류홍(柳泓)이 물려준 장검으로 무예를 연마했다. 49세 이괄(李适)의 변란(變亂 1624)에는 족손(族孫) 백석(白石) 류집(柳楫)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양호(兩湖)로써 근왕(勤王)의 계획을 세웠고, 52세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에는 조카 류응량(柳應良)과 함께 전라도(全羅道)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61세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에는 백형(伯兄)이 남긴 보검(寶劒)을 차고, 화순(和順)에서 거의(擧義)하여 맹주(盟主)로서 524명의 의병(義兵)을 이끌고 음력 정월 11일에 화순을 출발하여 여산(廬山)에서 호남 의병청 오현(五賢)과 만나 협의한 뒤에 별밤에라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려가서 일전(一戰)을 치르자며 진격했다. 1월 30일 청주(淸州)에 이르러 적(敵) 기마병(騎馬兵)을 맞아 아홉 명의 목을 베고 진격하다가 화의(和義)의 소식을 듣자, 북향 사배(北向四拜)하며 호천통곡(呼天慟哭)하고 2월 초4일 40일간의 의병 활동을 그치고 환향(還鄕)하여 정축(丁丑 1637)년에 환산정(環山亭)을 지어 절속(絶俗)하였다. 창의(倡義) 사실(史實)은 백천유집(百泉遺集) 병자거의일기(丙子擧義日記),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 1798)년 중간본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90세가 넘은 부모를 극진히 모셔 백천효자(百泉孝子)로도 불렸다. 부인은 전라도(全羅道) 도사(都事) 정곡(鼎谷) 조대중(曺大中) 선생의 둘째 따님으로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으니 모두 현량(賢良)하였다. 환산정(環山亭)에서 소요하고 시를 읊었으며 바람과 냇물에 뜻을 부쳐 시를 지었는데,
엽상춘추망갑자(葉上春秋忘甲子); 봄가을 나뭇잎에도 나이를 잊었지만 심중일월보황명(心中日月保皇明); 마음속에 일월로 황명을 보존했네.
라고 하니, 사람들은 그의 지조(志操)와 의리(義理) 있음을 칭송(稱頌)하고, 나라에서는 언동사(彦洞祠)에 배향하도록 했다.
-백천유집(百泉遺集)-
※거의격문 및 병자거의일기 내용까지 삽입 가능하면 넣어 주시고 저장공간이 안되면 위 쪽 백천유집 까지 만 넣어 주세요. 될 수 있으면 거의격문 및 병자거의일기를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의격문(擧義檄文)
슬프다. 우리 군부(君父)께서 바야흐로 남한산성으로 옮겨 머물렀는데, 저 하늘이 뚜렷하니 북쪽 오랑캐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있을 수 없노라. 이에 신하가 국가 [급난]에 나아가는 것은 마치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는 것과 같음이라. 참담하고 애통하며, 천명이고 운수인가? 문덕(文德)을 크게 폈지만 간우(干羽)로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도 오히려 늦었으니, 은밀한 모의는 쓰기 어려웠음이라. 누가 평성(平城)의 7일 포위를 풀 수 있겠는가? 지난봄 참호망존(僣號妄尊)해서 저 오랑캐가 황제라 일컬었으니, 지금의 흉봉(凶鋒)과 사학(肆虐)은 하늘이 두렵지 않음인가? 강역(疆域) 삼천리에 억조(億兆)의 백성이 왕의 신하 아님이 없고, 편히 쉬면서 심신을 보양한 지 수백 년에 어찌 한두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겠는가? 오직 우리 호남에는 사부원림(士夫園林)과 충의부고(忠義府庫)가 있어서 지난 임진(壬辰, 1592)년에 이미 입근사수(立慬死綏)의 절의를 지킨 자가 많았다. 지금 병자(丙子, 1636)년에 이르러 몸을 떨쳐서 근왕(勤王)의 군사가 되면, 한 때의 인(仁)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두 다 만세에 말이 있을 것인데 어찌 이를 사양하겠는가? 무지해서 사리에 어두운 오랑캐 유종(遺種)이 용사(龍蛇)의 년에 있었던 변방의 걱정보다 심하니, 누군들 애통절박(哀痛切迫)의 뜻이 없겠는가? 이는 진실로 위급존망(危急存亡)의 때라. 나[涵]는 초야에 묻혀 노후(老朽)하고 저력(樗櫟)의 쓸모없는 사람이라. 비록 군대의 일은 배우지 못했으나, 일찍이 󰡔춘추(春秋)󰡕의 책을 익히고 익혀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면, 비록 모자라지만 기력이 정정한 풍모를 가졌으니, 여러분들과 함께 짝이 되어서 먼저 창을 닦고 나의 날카로움으로 십승지행(十乘之行)을 열 것이다. 상황이 고식적(姑息的)으로 무사안일(無事安逸)만을 추구할 수 없으니, 마땅히 백배의 기운을 더 보태어야 뿌리와 줄기 또한 근본까지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동맹하기를 귀천(貴賤)과 사서(士庶)를 논할 것 없이 웅장(熊掌)을 가려서, 취하고 버리면 크고 작음과 무겁고 가벼움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종묘사직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누가 이약수(李若水)처럼 신의를 굳게 지켜서, 주군(州郡)이 다 무너지는 상황에서 안진경(顏眞卿)의 모병(募兵)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주군(主君)이 치욕을 받으면, 신하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고 싸워서 당연히 죽는 것이고, 아비가 급박하게 되면, 자식 또한 어디 간들 마음이 없겠는가? 이 두 마음은, 어려움에 닥쳐서 간신히 벗어나려는 마음씨 더러운 사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의(義)를 보면 곧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가 근심을 피하지 아니할 바가 있는데 어찌 침상에 드러누워 쉬겠는가? 차라리 육체와 정신을 길바닥에 바르고자 함이니, 이것이 바로 낮고 천함을 헤아리지 아니함이라. 이에 감히 여러 제위께 두루 고할 바가 있으니, 각자 거적을 덮고 자고 창을 베개 삼으며, 또한 모두 끓는 물에 달려가고 활활 타는 불을 밟는 것이라. 이처럼 널리 알린 뒤에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참견하지 않으며, 뒷걸음질 치고 적개(敵愾)의 뜻이 없다면, 이는 윤리와 기강의 죄를 얻어서 포만(逋慢)의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심력(心力)을 거의 다해서 요사스런 기운을 깨끗이 씻어야 할 것이다. 격문(檄文)이 글처럼 도달할 것이니 삼가 회보를 기다리노라.
숭정(崇禎) 9년(인조 14년, 1636) 12월 25일 화순(和順) 모의유사(募義有司) 류함(柳涵) 삼가 알림

병자 거의 일기(丙子擧義日記)
숭정(崇禎) 9년 병자(丙子, 1636)년 12월 24일 한밤중에 관아(官衙) 사내종이 문을 두들기며 서신을 주었다. 서둘러 열어보니 다른 말을 한 것은 없고, 다만 “일이 급하니 빨리 왕림하시오.[사급천왕(事急遄枉)]”라는 네 글자만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일어나 엎어질 듯이 관에 도착하니 류 후 훤(柳候萱)이 문에 나와 맞아드렸다. 한 봉서(封書)를 보여주는데 통유교문(通諭敎文)이 포위된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엎드려 몇 줄을 읽는데 목이 메어서 읽을 수가 없었고 겨우 목구멍소리로 아래까지 보기를 마쳤다. 원[倅,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나라 형세가 이와 같은데 어르신께서는 보신 바가 어떠십니까?”라고 하니, 공[公, 백천(百泉)]이 “우리 집은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어서 보답하고자 함에 몸 둘 데가 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임금이 욕을 당하셨으니 신하가 죽을 날입니다. 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원컨대 한 무리의 군사를 불러 모아 국가의 위급에 달려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다시 절하고 사례하며 “이는 참으로 대장부다운 말씀이십니다. 나 또한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함께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천공(百泉公)이 “큰일은 날이 밝기 전이라도 구제할 수 있으니 교문(敎文)을 경내(境內)에 돌려보여서 단 한 백성이라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나는 마땅히 집에 돌아가서 사당에 알리고, 가속들에게 알아듣게 타일러서 얼마간의 계책을 은연중에 맺고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동방이 이미 밝았다.
○25일이다. 여러 자식 및 노복들을 불러서 교문(敎文)의 글 뜻을 알려 거의(擧義)할 뜻을 보이니, 맏아들 지성(之性, 1603-1667)이 무릎을 꿇고서 “국운이 어려우니 일은 비록 당연하지만 상유모경(桑楡暮景)에 정력도 회복되지 않았고, 전에 융사(戎事)를 막중하게 치렀는데 어찌 부담을 지시겠습니까? 소자가 마을 여러 어진 이들과 힘을 함께해서 일을 구제할 것이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노친께서는 염려치 마르소서.”라고 하니, 백천공(百泉公)이 “네 말이 또한 더없이 아름답지만, 집안에 소장한 보검 한 자루는 임진란(壬辰亂)에 맏형이 백의(白衣)로 종사하면서 평양(平壤)에서 순절한 뒤에 되돌아와 삼가 지켜온 것이라. 상자를 열고 보면 서릿발 같은 칼날이 번쩍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허리에 차고 노복 등에게 분부하기를 “몸을 던져 보국하는 뜻은 이미 가슴속에 결정하였으니 어찌 의심하고 두려워하랴? 대범 군신(君臣), 부자(父子), 주노(主奴)는 그 이치가 하나이다. 신하는 임금을 위해서 죽고,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죽으며, 노비는 주인을 위해서 죽는 것은 널리 만고에 통하고, 천하의 큰 도리이며 큰 법이거늘 너희들은 그것을 아는가?”라고 하니, 우두머리 노복 상귀(尙貴) 등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우리들은 모두 거의(擧義)가 행해질 것을 다 알고 있어 다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모금(毛金), 덕진(德辰), 보금(甫今), 보덕(甫德), 옥단(玉丹), 옥매(玉每) 등 수십 인에게 명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옹위하여 빨리 가면 읍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혼자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가서 객사 문 밖에 사람을 맞을 모의청(募義廳)을 설치하고 한참을 앉아 있으니, 향유(鄕儒) 조수성(曺守誠), 조엽(曺熀), 최명해(崔鳴海), 임시태(林時泰) 여러 공들이 각각 자기 집의 사내종[家僮]들을 거느리고 왔다. 백천공(百泉公)이 여러 공들의 손을 잡고서 “뜻 있는 선비들이 모의하지도 않았는데 이에 함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거의(擧義)의 일을 더불어 모의하는데 백천공(百泉公)이 “대범 군대의 일은 넉넉한 식량과 넉넉한 병사가 최초의 급한 임무라. 금일 동지들은 오직 우리 4, 5인뿐이지만, 먼저 가저(家儲)를 기울이고 집안의 사내종들을 인도하여 거느리며, 시설을 규모 있게 하고 위의(威儀)를 엄정하게 할 것 같으면, 한 고을의 대소(大小) 인민들이 병량(兵糧), 기계(器械) 비용을 보조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여섯 면에 두루 알립시다.”라고 하니, 모두 “예, 예”라고 하였다. 백천공(百泉公)이 류훤 현감(柳萱縣監)에게 “성주(城主)는 한 고을의 장(長)이니, 경내(境內) 장정 모집 일을 성주(城主)께서 주관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병기(兵器)를 주조(鑄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각 지역의 유사(有司)로 능주(綾州)의 양우전(梁禹甸), 문제극(文悌克), 민팽령(閔彭齡), 남평(南平)의 서행(徐荇), 정반(鄭槃), 윤숙(尹俶), 나주(羅州)의 류준(柳浚), 최진강(崔震岡), 홍명기(洪命基) 이환(李煥), 광주(光州)의 고부립(高傅立), 박사원(朴思遠), 류동환(柳東煥), 신필(申滭), 동복(同福)의 정호민(丁好敏), 김성원(金聲遠)에게 부탁하였다. 맏아들 지성(之性, 1603-1667)에게 의청(義廳)을 지키게 하고, 둘째아들 지기(之起, 1605-1671)는 문묵(文墨)을 주관하게 하였다. 최명해, 임시태가 “매마(買馬), 병기(兵器), 주조(鑄造), 군량(軍糧), 군복(軍服) 등의 일은 우리 두 사람이 주관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6일 각 절에 패(牌)를 보내어 군중(軍中)에 소용되는 여러 물건을 거둬들이는 일을 알렸다. 오후에 이흥발(李興浡), 류집(柳楫)의 격문이 도착했는데 집(楫)은 백천공(百泉公)의 친족 종손이다. 학행으로 등용(登庸)된 인재로 문무를 겸했는데 호남 모의유사(募義有司)가 되었다.
○27일 가저(家儲) 쌀 20석, 조수성 23석, 최명해 10석, 임시태 8석 조수헌(曺守憲) 10석, 조찬(曺燦) 10석을 냈다.
○28일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장정 80명을 모집하여 왔다. 그 중읍(中邑)에 사는 한량(閑良) 편성대(片成大) 한명남(韓命男) 김위징(金魏徵) 증경(曾經)은 군(軍)을 맡았는데 군사의 일에 자못 밝아서 훈련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고, 배홍립(裵弘立) 김진성(金振聲)은 군사들의 먹거리를 주관하였다. 향인(鄕人) 장경흡(張慶洽) 노덕량(盧德量) 등은 근력이 남보다 나아서 특별히 청해서 들어오라고 말하고 함께 일을 하자 하니 사양하지 않았다.
○29일 시골 유생 공우길(孔遇吉) 공형길(孔亨吉)이 와서 군 장정 15명과 쌀 3석을 스스로 맡고, 최기종(崔起宗)은 군 장정 14명과 쌀 8석을 스스로 맡았으며, 임시민(林時敏), 임시경(林時慶), 임시익(林時益), 임시준(任時儁), 임시계(任時啓)가 와서 군 장정 18명, 쌀 25석, 철 40근을 스스로 맡았다. 군 장정 18명, 쌀 5석, 콩 5석, 화살대 500개, 철 50근은 백천공(百泉公)의 아들 지기(之起)가 스스로 맡았고, 만연사(萬淵寺) 스님 후(厚)는 백지 10속(束)을 헌납했다. 오후에 옥과(玉果) 격문이 또 도착하고, 한 폭의 서찰이 따라 왔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족손(族孫) 집(楫)은 삼가 재배(再拜)하고 족대부(族大父)님께 마루 아래 엎드려 글을 올립니다. 기체후만안(氣體候萬安)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노년에 군무(軍務)를 어떻게 감당하오신지요? 삼가 민망하고 또 민망합니다. 족손은 본디 병가에 대한 배움이 없고 학문도 거칠고 얕아서 이 전체를 살피는 책임을 지기에는 거듭 거듭 근심과 두려움뿐입니다. 일전에 화순(和順) 류훤 현감(柳萱縣監)의 서찰이 도착했는데, 본읍(本邑)의 거의(擧義)에 대부님께서 앞서 인도하시고, 뭇사람의 서로 다른 의견을 모두 함께 하셨다고 운운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로써 순영(巡營)에 이미 보고했으며, 「병가긴요(兵家緊要)」 한 통의 글을 올리오니 때때로 살피시면 거의 큰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부디 조심하고 조심하십시오. 옆에 있는 제공(諸公)들이 돌아가면서 살피며 “이는 참으로 병가(兵家)의 요결(要訣)이다. 금일 맹주(盟主)는 저절로 그 사람이 있음을 바로 알았다.”라고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병가(兵家)의 천만 가지 말이, 그 요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오직 속오(束伍)에 있다. 이른바 속오(束伍)라는 것은 곧 수를 나눔이다. 위(衛)는 부(部)를 거느리고 부(部)는 기(旗)를 거느리며, 기(旗)는 대(隊)를 거느리고, 대(隊)는 오(伍)를 거느리는 류(類)가 이것이다. 대개 군병(軍兵)이 혹 천, 혹 만에서 십만, 백만에 이르게 되면 또한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대장 한 사람의 몸으로는 그의 이목(耳目)과 정신(精神)이 제한되어 있는데 분수(分數)의 방법으로 긴밀하게 묶어 엄정하게 하여 어지럽지 않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일일이 그 호령을 행해서 운용(運用)이 자기로 말미암아서 나올 수 있겠는가? 만약 군사의 숫자를 나눔이 이미 분명할 것 같으면 목(目)이 강(綱)에 속한 것과 같아서 일강(一綱)은 족히 만목(萬目)을 통제하니, 마치 가지[枝]에 붙은 뿌리처럼 뿌리 하나면 족히 가지[枝] 만(萬)을 이을 수 있다. 그러므로 1사(一司)가 5초(五哨)를 통제하니 호령을 받은 자는 다만 5인일 따름이다. 1초는 3기(旗)를 통제하고, 1기는 3대(隊)를 통제하니 명령을 받은 자는 다만 3인일 따름이다. 1대가 5오(伍)를 통제하면 명령을 받은 자는 다만 5인일 따름이고, 오(伍)는 군사 4인을 인솔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통제를 받는 것이 점점 많아지면 나뉨도 점점 세분되고, 나뉨이 점점 세분되면 살피는 것도 점점 정밀해진다. 이것이 군법의 강령(綱領)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있어서는 이것으로 무리[衆]를 다스리면 장졸(將卒)이 서로 유지되고 연습이 쉬우며, 일에 임해서는 이로써 절제하니 팔과 손가락이 서로 기다리고 선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른바 만인(萬人)을 합해서 일심(一心)이 되는 것이다. 모두 이로 말미암아 이루면 비로소 절제된 군사라 이를 수 있다. 지금 장수된 자는 한 사람도 이 의미를 아는 자가 없고, 무릇 이른바 조정 관리와 양반은 활 잡는 것을 조금만 이해해도 군관(軍官)이라 부르지만, 휘장 아래 모여 있는 군사를 나누는 것도 못하고 옆에서 응대에 대비해서 겨우 사환의 임무나 할 따름이다. 군졸에 이르러서는 모두 각관(各官)에서 임시로 보내졌는데, 시골에서 온 백성이라 번(番)을 서는 임무를 교체하려고 왕래하지만, 본래 진을 치고 싸우는 일을 알지 못하고, 또 대(隊) 오(伍) 기(旗) 초(哨)가 없어서 예속된 곳이 없으니, 여기저기 몰려 있어 어지럽고 붐비며 시끄럽고 문란하기만 하고, 수족이나 이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갑자기 화살과 돌이 날아드는 죽음을 건 전쟁터로 몰면, 그 힘써 싸워 적을 이기는 것을 구하는데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진실로 조직하는 것을 알면 비록 시정(市井) 오합(烏合)의 군사라 할지라도 모두 가르쳐 단련해서 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조직하는 것을 모른다면 비록 굳센 할을 당기고 수레에 뛰어 올라타는 군사라 할지라도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될 것이니, 이로써 조직하는 일, 한 가지를 알면 군사를 다루는 큰 줄기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책에 지극히 잘 갖추어져 있으니, 뜻있는 선비들이 진실로 이 책을 얻어 보고서 본받아 따라하면, 군사를 다루고 적을 억누르는 방법의 반은 넘었다고 생각됩니다.”
○30일 전쟁을 할 때 쓰는 벙거지[戰笠] 42개 능주(綾州) 쌍봉사(雙鳳寺) 스님이 와서 내고, 또 숙마(熟麻) 끈 200줌[把], 유삼(油衫) 5건(件)을 냈다. 동복(同福) 유마사(維摩寺) 스님은 마혜(麻鞋) 50켤레[兩], 갈구(葛屨) 100켤레, 숙마(熟麻) 새끼줄 50줌을 냈다. 한명남(韓命男) 편성대(片成大)로 하여금 군정(軍丁)의 습사(習射)와 분오(分伍)를 점고(點考)하게 했다. 마을 선비 박상진(朴尙眞)이 집의 사내종 17명, 쌀 13석, 콩 3석, 칼 1자루를 가져왔고, 편성대는 쌀 2석, 간장 1해(海)를 냈으며, 김위징(金魏徵)이 쌀 10말[斗]을 냈다. 군정(軍丁)은 쌀 1근(斤), 의청회원(義廳會員)은 7홉(合)으로 계획[磨鍊]하였다.
○정축(丁丑)년 정월 초하루 닭이 울 때 일어나 관(官) 주방장에게 명하여 소를 잡고[宰牛] 술을 걸러[醑酒] 그릇에 갖추어서 크게 제공하고, 문 출입을 금한 것도 늦추고, 취하고 배불리 먹고 즐기도록 잔치를 베푸니, 한 고을 노소들이 와서 보는데 그 모임이 마치 숲 같았다. 백천공(百泉公)이 무리에게 포고하기를 “오늘은 좋은 날이라 비록 군대 안에 금하는 것을 늦추었지만, 흩어진 사람들은 출입을 제멋대로 하지 말라. 군율이 곳곳에 있으니 내일부터는 신중히 하고 또 신중히 하라.”라고 하고, 또 의기(義氣)로 격동(激動)하여 깨우쳐 말하기를 “󰡔논어(論語)󰡕에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였고, 󰡔맹자󰡕에는 ‘사생취의(捨生取義)’라 하였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람이 누군들 죽음 없이 나랏일에 죽겠는가? 이치가 마땅히 그러하니 죽음 또한 말이 있음이라. 종군자(從軍者)가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니, 요행이 인(仁)을 이룰 것 같으면 조정에서 반드시 포상의 은전이 있을 것이다. 어찌 한순간에 삶을 욕심내고 마침내 십 년의 명예를 없애겠는가?”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스스로 의(義)에 나아가겠다는 사람이 10여 인이었다.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찬탄하기를 “충의를 받듦이 사람의 뱃속에 있도다.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나처럼 부천(膚淺)한 사람은 다만 국록을 허비하였으니 열흘 달리는 수레로도 따라갈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2일 편성대(片成大)로 하여금 속오법(束伍法)을 가르치게 하여 위(衛)가 부(部)를 통제하고, 부(部)가 기(旗)를 통제하며, 기(旗)가 대(隊)를 통제하여 숫자를 나누어 조직을 긴밀히 단속하고 질서가 정연해서 문란하지 아니하니, 일일이 호령을 행하여 운용(運用)이 자기로 말미암게 했다.
○3일 광릉(光陵)의 여려 유사(有司)들이 와서, 군졸들이 앉았다 일어나고 나아갔다 물러남에 법도가 있음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작은 고을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온전한 인재가 있다.”라고 하였다.
○4일 큰 소 1마리가 최명해(崔鳴海) 집에서 오고, 1마리는 백천공(百泉公)의 셋째 아들 지서(之瑞, 1611-1675)의 집에서 오고, 최 주부(主簿)는 쌀 5석, 간장 3병을 보냈다. 최명해(崔鳴海)가 옥과(玉果) 의소(義所)에서 돌아와 여산(礪山)에서 서로 모일 것을 기약했다고 운운.
○5일 종일 훈련하였다. 소 1마리가 조수헌(曺守憲) 집에서 오고, 1마리는 조찬(曺燦) 집에서 오고, 1마리는 백천공(百泉公)의 넷째 아들 지화(之和, 1614-1678) 집에서 왔다.
○6일 큰 비와 눈. 해 뜨는 시각에 군 장정을 점고하고, 군량(軍糧), 기계(器械) 등 물건을 검열하였는데 군졸 524명, 말 54필, 활 150[대], 화살 1280부, 창 85자루, 총 72[자루], 화약 110근, 칼 62자루, 쌀 150석 10말, 콩 50석, 마초 350속이다. 백천공(百泉公)이 여러 유사들과 의논하기를 “수일 후에 길을 떠날 것인데 후량(餱糧) 준비가 너무 부족하니 어찌할까? 옛말에 ‘창고에 붉게 썩은 곡식이라도 쌓아놓은 것이 없으면, 군사는 돌을 던질 용기도 없어진다.’라고 하였으니, 여러분들은 다시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박상진(朴尙眞)이 “일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인색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가산을 기울여 군(軍)을 도웁시다.”라고 하였다. 모두 좋다고 하니 백천공(百泉公)이 먼저 쌀 10석을 내고, 조엽(曺熀) 10석, 조수성(曺守誠) 10석, 임시태(林時泰) 8석, 최명해(崔鳴海) 7석, 조수헌(曺守憲) 7석, 조찬(曺燦) 7석, 박상진(朴尙眞) 7석, 공형길(孔亨吉) 4석 백천공(百泉公)의 다섯째 아들 지혜(之惠, 1623-1692) 4석, 편성대(片成大) 등 12석, 말 2필,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또 말 2필을 보내왔다.
○7일 박상진(朴尙眞)이 화살 30부(部)를 얻고, 백천공(百泉公)의 아들 지서(之瑞)가 말 2필을 얻어 왔다. 남평(南平) 유사(有司) 서행(徐荇) 능주(綾州) 유사(有司) 양우전(梁禹甸)이 왔다. 백천공(百泉公)이 “이제 군량과 여러 도구가 대략 갖추어져서 출발할 수 있으니 11일로 정합시다.”라고 하니 여러 유사들이 모두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8일 광주(光州) 유사(有司) 박사원(朴思遠)이 왔다.
○9일 남산 아래에서 활쏘기 연습하고 방포(放砲)하였다.
○10일 군사에게 먹이려고[犒軍] 소 1마리, 술 5병이 조엽(曺熀) 집에서 오고, 소 2마리가 공형길(孔亨吉), 임시민(林時敏) 집에서 왔다. 술 6해(海), 청어(靑魚) 30속(束)이 조수헌(曺守憲) 집에서 오고, 술 5병, 대구어(大口魚) 10미(尾)가 조정유(曺挺有) 집에서 왔다. 닭 10마리, 술 2병이 임시태(林時泰) 집에서 오고, 술 5병, 청어 15속(束)이 공의 아들 지혜(之惠) 집에서 왔다. 술 2병, 송아지 1마리가 박상진(朴尙眞) 집에서 오고, 술 2병, 개 2마리가 노덕량(盧德量) 집에서 왔다. 술 3병, 개 2마리가 장경흡(張慶洽) 집에서 오고, 떡 8그릇[器]이 최명해(崔鳴海) 집에서 왔다. 고을의 사우(士友)와 소민(小民) 일동이 술, 고기, 집물(什物)을 가져왔는데 모두 기록할 수 없다. 합계 술 80여병, 떡 90여 그릇, 어육(魚肉) 70여 그릇, 간장 50병, 소 2마리인데 내일 출발해서 줄 음식으로 두었고, 소 1마리 및 여러 육류들은 군중(軍中) 행찬(行饌)으로 계산해 두었다. 만연사(萬淵寺) 스님이 밥 지을 쌀[飯米] 30말[斗], 산나물 20속(束), 장지(壯紙) 5속, 유지(油紙) 2속 미투리 60부(部)를 내왔다.
○11일 닭이 세 번 울자, 군리(軍吏)를 불러 분부하기를 “오늘 반드시 계행(啓行)할 것이니, 사졸들이 급히 일어나 밥을 짓도록 명령을 재촉하고 창고의 술과 고기를 내주라.”고 하였다. 또 군색(軍色)에게 명하기를 “떠날 차비를 정비하고, 얻은 말 50필 안에서 군색과 군리[軍色吏]가 탈 말 8필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에는 각각 활, 화살, 양초(糧草)를 실어라.”고 했다. 또 명령하기를 “50명의 장정들은 양식을 지고 앞서 출발하여 너릿재[板峙]에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양식 쌀 90석은 창고에 두고 육로로 계속 올려 보내 달라는 뜻을 류훤 현감(柳萱縣監)에게 부탁하며 “이는 모두 현후(贒候)의 힘입니다.”라고 하니,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는 모두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한 여러분의 정성입니다.”라고 하였다.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또 창 3자루와 영번(令旛) 한 쌍을 보내왔다. 이날 향인(鄕人)들이 와서 전별(餞別)한 자가 수백 인이다. 백천공(百泉公) 및 여러 유사(有司)들은 일제히 말에 올라타고, 편성대(片成大) 김진성(金振聲)으로 북을 치고 기를 휘두르며 선도하고, 최림(崔林) 제공(諸公)은 후군(後軍)을 살피게 하고, 또 일제히 길에 올랐다. 류훤 현감(柳萱縣監)이 함께 너릿재[板峙] 위에 이르러 제공(諸公)과 더불어 이별주를 마시고, 광주(光州)에 도착할 즈음에 북문 밖의 사인(士人)들이 와서 본 자가 40여 인인데 스스로 군사들의 조석 군량을 담당하였다.
○12일 장성(長城)에 도착하니 소와 술을 가지고 환영하며 수고하는 자가 심 히 많았다.
○13일 노령(蘆嶺)에 도착하니 바람과 눈이 크게 일어 고개 아래에 머물렀다.
○14일 태인(泰仁) 읍에 도착.
○15일 금구(金溝) 읍에 도착.
○16일 전주(全州)에 도착. 병사를 서문 밖에 주둔하였는데 공이 기뻐하지 않은 기색이 있어 옆에 있던 사람이 물으니, 공이 “기축(己丑, 1589)년 화를 만나 서울에서 남하하여 여기로 흘러와 머물렀는데, 별로 오래되지 않은 옛날 일을 생각하니 자연히 마음이 상하고 슬프다.”라고 했다.
○17일 큰 비와 눈. 오후에 조금 갰다. 1차 훈련을 하고 유숙하였다.
○18일 이흥발(李興浡)은 백천공(百泉公)이 이르렀음을 들었다. 심부름꾼이 와서 “일이 급하여 지체할 수 없다.”라고 하니, 이날 바로 출발하여 삼례(參禮) 역에서 묵었다.
○19일 여산에 도착한 이흥발(李興浡), 류집(柳偮) 등이 먼저 여산(礪山)에 주둔하고, 각 읍 병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본도(本道) 감사(監司) 이시방(李時昉)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서(湖西)에 있던 정홍명(鄭弘溟)은 의병대장으로 감사(監司)와 힘을 합하였다. 백천공(百泉公)이 제공(諸公)과 의논하기를 “이 공[李興浡]이 만약 저[李時昉 군대]와 합치자고 하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조수성(曺守誠)이 “우리들은 수백 의병을 인도하여 이곳에 도착했는데 어찌 남에게 제재를 받겠습니까? 내가 모집한 바를 거느리고 별도로 1대(一隊)를 맡겠습니다.”라고 하니, 백천공(百泉公)이 “바로 제 뜻과도 합치됩니다. 비록 그렇지만 여러 동정을 살펴보아 방법과 계책을 결정합시다.”라고 하였다.
○20일 여산(礪山)읍에 이르러서 이흥발(李興浡)이 제공(諸公)과 함께 만났다. 이 공[李興浡]이 군사가 행군(行軍)할 기일(期日)을 묻자, 백천공(百泉公)이 “군량이 부족하여 본읍에 남겨 둔 쌀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21일 큰 비와 눈이 종일 내렸다.
○22일 잠시 쉬고 조열(操閱) 1차.
○23일 조열 2차.
○24일 종일 활쏘기[貫革].
○25일 군사들에게 먹이고[犒軍], 이기발(李起浡) 공(公)이 와서 보았다.
○26일 본읍에 남겨 둔 쌀 90석이 올라왔다. 이는 본관(本官)이 백성장정[民丁]을 발동하여 수송해서 장성(長城)에 이르렀다고 하니 군졸을 보내 가져오게 했다. 다음날 진군의 뜻으로 이 공[李興浡] 막하(幕下)에 글을 바쳤다.
○27일 공주(公州) 경계에 도착.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소 2마리, 쌀 10석, 활 화살 30부와 수십의 기로군(騎勞軍)을 인솔하였다.
○28일 큰 바람과 눈을 만나 병사들이 나아갈 수 없었다. 백천공(百泉公)이 여러 장사들에게 맹세하기를 “나라의 위태로움이 바야흐로 조석에 달려 있으니 별밤에라도 남한산성으로 가서 성을 등지고 일전(一戰)을 하자.”라고 하고,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몸을 떨치고 일어나 말에 오르니, 모든 군사의 예기(銳氣)가 더욱 씩씩하여 마침내 병사들이 나아갔다.
○29일 청주(淸州) 서평원(西平原)에 도착. 유기(遊騎)가 산 계곡 중에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군사의 정세가 흉흉하고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하니, 감히 가볍게 나아가지 못하고 험지(險地)에 의지해서 스스로 지키고 있을 때, 여러 읍에서 병사를 모집하였으나 대부분 도망(逃亡)하고, 또 적의 형세가 다리를 건너오니 의병(義兵)과 제장(諸將)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상의하기를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숫자가 적으니 산 위에 기치(旂幟)를 매달고 쇠북으로 서로 들리게 하여 병사로 의심케 하고, 적들로 하여금 구원병이 계속 있는 것으로 알게 하여 감히 성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면서, 남한산성으로 하여금 근왕사(勤王師)가 이르러 옴을 알게 하고, 수비(守陴)를 더욱 견고히 하면 이는 좋은 계책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말을 탄 적의 군사가 이미 여기 경계에 이르렀으면, 반드시 중병(重兵)으로 먼저 끊고 좁은 입구로써 막으면, 삼남(三南)의 원병을 가벼이 추격하지 못할 것이니, 진을 옮겨 험지에서 버티면서 탐문하여 소식을 듣고 병사를 나아가도록 의도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백천공(百泉公)이 “병사들이 의로써 일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데 머뭇거리면 비웃음사기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샛길을 따라 바로 남한산성으로 밀어붙여 성첩(城堞)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 공(李公) 등이 모두 그 의견을 따랐다.
○30일 날이 밝자, 각 진중(陣中)에서 두루 모집하여 산 계곡에 있는 적의 형세를 가서 엿보게 하였는데 응하는 자가 없었다. 양만용(梁曼容), 이기발(李起浡), 류집(柳楫)이 몸을 떨치고 가기를 청하니 바로 명령을 내려 5, 6포수로 뒤를 따르게 하였다. 산에 올라 적을 내려다보니 적기(賊騎) 수백이 계곡 중에 모여서 소와 말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단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이면서 기발(起浡)이 자기 혼자의 약함을 속이려고, 따르는 자로 하여금 일제히 방포하게 하니, 적기(賊騎)가 크게 놀라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주둔지를 포위하니, 기발(起浡)이 바로 허겁지겁할 즈음에 백천공(百泉公)이 여러 장사와 함께 굳센 병졸 50명을 데리고 그 뒤에 다다랐다. 이 공[李起渤]이 포위된 것을 보고, 몸을 빼 돌진하여 나아가 양만용(梁曼容), 류집(柳楫)과 함께 힘을 합쳐 적기(賊騎)를 죽여 흩었는데 머리를 베인 자가 9명이고, 버려진 병기를 획득하여 돌아오니, 우리 병졸 죽은 자가 5, 6인이고, 상처를 입은 자가 또한 10여 인이었다. 제공(諸公)이 모두 즐거움을 베풀고 서로 축하하였다. 백천공(百泉公)이 웃으면서 “간흉을 물리쳐 없앤 것은 군부(君父)의 수치를 기분 좋게 씻은 것이며, 이는 신하의 직분이라 이 어찌 족히 축하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바람과 눈이 그치지 않아서 의병(義兵)과 제장(諸將)이 모두 산 아래 큰 마을로 옮겼는데 마을사람들이 모두 피란(避亂)을 가서 사졸(士卒)이 빈 집에서 머물러 쉬었다.
○2월 초하루 날이 밝자, 군사들을 먹여 위로하고[犒軍], 군리(軍吏) 2인을 보내 앞길을 가서 소식을 탐문하게 하면서 사졸에게 명하여 틈틈이 종일 연습하며 기다리니, 척후병(斥候兵)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2일 오후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앞길 70리에는 적병(賊兵)이 보이지 않으나 남한산성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다시 영리(伶俐)한 자 2인으로 하여금 소식을 자세히 탐문하게 하고 병사에게 30리를 나아가게 했다.
○3일 날이 밝자, 의병(義兵)과 제장(諸將)이 다시 한 곳에 모여서 군병을 세어서 검열하니 각 진에서 없어진 자가 30여 명이고, 우리 군에서 도망간 자는 7인이었다. 그 부대장을 조사하여 곤장 3대를 결정하며 약속을 엄하게 펴고, 군사를 먹여 위로하고 머물렀다.
○4일 닭이 울자, 군량으로 밥을 지어 먹고 행군하려고 하는데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경성(京城) 소식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혹 적병이 이미 패하여 돌아가고, 임금님의 수레가 환궁했다고 합니다.”라고 하니, 제장(諸將)이 믿을 수 없다면서 “흉적이 어찌 쉽게 패할 리가 있으리오. 이는 반드시 잘못 전하는 말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다시 30리를 나아간 다음에 청주부(淸州府) 내(內) 근처에서 화의(和議)가 중간에 이루어졌다는 소문을 비로소 들을 수가 있었다. 제공(諸公)과 장사(壯士) 모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의병대 파견을 그치고 돌아왔다. 백천공(百泉公)의 시에,

머리 돌려 제잠을 보니 한낮이 차갑고 回首鯷岑白日寒
오랑캐 재앙 요사스런 기운에 한양이 어둡구나 胡氛妖氣暗長安
어떻게 하면 우리의 당당한 선비 이끌고 가서 何當携我堂堂士
결박하여 취한 호한야를 휘장 아래서 볼거나 縛取呼韓帳下看

※참고문헌:
『호남병자창의록(湖南丙子倡義錄)』(1798),
『해동삼강록(海東三鋼錄)』(1805),
『화순읍지(和順邑誌)』(1913),
󰡔백천유집(百泉遺集)󰡕 <병자거의일기(丙子擧義日記)>(1919),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39),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964),
『전남도지(全南道誌)』(1968),
『화순군지(和順郡誌)』(1980),
󰡔충의사록(忠義士錄)-광주전남오란(光州全南五亂)』(全南忠義士顯彰會,1992),
󰡔국역(國譯) 새로 보는 오성지(烏城誌)
󰡕 <유일(遺逸)>편(1992),
󰡔문화류씨검한성공파세덕지(文化柳氏檢漢城公派世德誌)󰡕(2004),
󰡔신증화순읍지(新增和順邑誌)󰡕(2006),
󰡔화순충의록(和順忠義錄)󰡕(2014)
󰡔화순의병사(和順義兵史)󰡕(2021)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