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명(柳漢明), 병사공(兵使公), Ryu, Han-Myeong, 생몰년:1649~1707, 세:23
肅宗朝 武將, 夏亭公派, 자 숙장(叔章). 호 지지당(知止堂)
증좌승지 의남(贈左承旨 義男)의 손이요, 증병조참판 무(贈兵曹參判 楙)의 3자로 인조(仁祖) 27년 己丑 6월 15일생인데 기질이 영특하고 의표(儀表)가 당당하였으며 문장과 필법이 비범(非凡)하여 일세에 명성을떨쳤다.
숙종(肅宗) 4년 戊午(1678)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博官)에 제수되었더니 6년 庚申(1680)에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옮겼다가 얼마 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다시 군기시(軍器寺)로 전직, 판관(判官)을 지냈다. 이듬해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가 청렴결백하게 백성을 다스리니 칭송이 이웃 고을까지 들리었다.
10년 甲子(1684)에 부사과(副司果)로서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승진하고, 이듬해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에 옮겼더니 12년 丙寅(1686)에 나주영장(羅州營將)으로 나가 만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0년 동안 신병을 간호하였다.
21년 乙亥(1695)에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복직되어 부호군(副護軍)에 승진하고, 이어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풍속이 달라지니 사민(士民)들이 기꺼 히 복종하였다.
23년 丁丑(1697) 5월에, 왕명(王命)으로 경학(經學)에 밝고 행의(行誼)가 훌륭한 이를 천거토록 하였는데 당시 병조판서 신여철(兵曹判書 申汝哲)과 예조판서 김진구(禮曹判書 金鎭龜)의 천거로 18인 중에 들었다. 회령(會寧) , 장단(長湍)의 부사(府使)를 지내고, 25년 己卯(1699) 11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 재임중 선정을 베풀어 연해(沿海)가 무사하였다.
이로서 백성의 칭송이 자자하고 또한 주상(主上)으로부터 특별히 숙마(熟馬) 일필을 하사(下賜)받았다.
31년 乙酉(1705)에 강계방어사(江界防禦使)로 나갔는데 성곽(城郭)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입번군정(入番軍丁)으로 하여금 석회(石灰)를 굽고 돌을 운반케 하여 민간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3년만에 역사(役事)를 마치었다. 이에 조정으로부터 포상(褻賞)으로 납약 일봉(蠟藥 一封) , 호초삼승(胡椒三升) , 궁자 일장(弓子一張) , 전일부(箭一部) 및, 활에 소용되는 물품 일체를 하사받았다. 한편 품계를 올려 통제사(統制使)로 천망(鳶望)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때는 33년 丁亥 8월 8일로 향년 59세였다.
동년 10월 19일에 주상께서 예조좌랑 여명거(禮曹佐郎 呂命擧)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배위 부안김씨 (扶安金氏)는 상고(尙古)의 따님인데 오랫동안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백씨 한상(伯氏 漢祥)의 4자 수관(壽觀)을 맞아 계자(系子)한 후 1남 1녀를 두어 아들은 수일(壽一)이요, 사위는 원주원의서(原州元義瑞)이다.
계자 수관(壽觀)은 숙종(肅宗) 31년 乙酉(1705)에 생정백형 수정(生庭伯兄 壽鼎)과 진사시(進士試)에 동방(同榜)으로 급제하고, 그 후 음사로 현릉참봉(顯陵參奉),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내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효우(孝友)로 집을 다스리고 경학(經學)을 스스로 즐기었다.
공의 묘소는 장성 기동(長城 基洞) 조고 묘소(祖考 墓所)의 청룡등사좌(靑龍嶝巳坐)에 합폄으로 모셔 있으며, 후손은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扶安郡 保安面 柳川里)에 세거하고 있다.
※ 長城誌,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