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생 (柳漢生)

류한생(柳漢生), 소윤공(少尹公), Ryu, Han-Saeng, 생몰년:1402-1449, 세:15
世宗朝 蔭仕. 忠景公派.

충경공 량(忠景公 亮)의 계자(孝子)로 태종(太宗) 2년 정월 22일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丙申(1416) 4월에 부친 충경공 상(喪)을 당하여 장례를 예절대로 극진히 치렀다.
복제를 이미 마치고 세종(世宗)이 즉위하심에 당하여 공신의 자제로서 공신도감승(功臣都監丞)에 특배(特拜)되었다. 이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 좌랑(佐郎)을 거쳐 12년 丙戌(1430) 9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指平)으로 재직중 언사(言幸)로 파직당하였다.
16년 甲寅(1434) 정월에 모친 이씨(李氏)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치고 18년 丙辰(1436)에 도관정량(都官正郞)에 발탁되었더니 이듬해 형조정랑(刑曹正郎)으로 옮겼다가 바로 제용감부정(濟用監副正)에 승진하였다.
23년 辛酉(1441)에 당시 평안도(平安道)에 오래된 옥사(獄事)를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공께서 경차관(散差官)으로 가서 득실(得失)을 명백히 처결하고 돌아와 이듬해 평안도경력(平安道經歷)으로 나갔다.
25년 癸亥(1443)에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가 혜정(惠政)을 베풀고, 어느 고을 목사(牧使)를 거쳐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으로 재직중 30년 戊辰(1448) 겨울에 병으로 물러났다.
세종 31년 己巳 3월, 집에서 돌아가시니 때에 나이 겨우 48세였다. 동년 12월 13일에 양주 동촌 마산리 (楊州 東村 馬山里), 지금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 내동(楊州郡 和道面 倉峴里 內洞) 후록 건좌(後麓 乾坐)에 안장되었다.
공은 천성이 단방명신(端方明愼)하고 행사가 민첩하여 내직에 있어서는 명사(名士)로 일컫었고, 한편 이치 (吏治)에 밝아 이르는 곳마다 성망(聲望)이 높았었다.
일찌기 정주(定州) 고을을 지내면서 제영(題詠)을 지어 이르기를 『아득한 바다에 파도가 잠잠하고 기름진 언덕에 장마비가 어둡도다』하였다.
<茫茫滄海狂瀾靜 撫撫聞原積雨暗>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니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 낭간 류성원(?? 柳誠源)이 만사(挽辭)를 지어 애도하였다.
배위 화순최씨(和順崔氏)는 상호군 우(上護軍 宇)의 따님으로 묘소는 합부(合祔)로 모시었고, 묘지명은 당시 영의정 경재 하연(領議政 敬齋 河演)이 지었다.
6남 2녀를 두어, 아들 훈(纁)은 천안군수(天安郡守)요, 륜(綸)은 합천군수(陜川郡守)요, 채(綜)는 성주목사(星州牧使)요, 작(綽)은 신천군수(信川郡守)요, 약(約)은 금산군수(錦山郡守)요, 인(絪)은 생원(生眞)이며, 사위는 부사 원주변석륜(府使 原州邊石崙)과 찰방 최연령(察訪 崔延齡)이다.
지난 己亥(1959)에 묘비를 개수하고 丁卯(1987) 10월에 묘소 아래에 재실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였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墓誌銘.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