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항 (柳沆)

류항(柳沆), 운강공(雲江公), Ryu, Hang, 생몰년:1621-1703, 세:21
顯宗朝 學行, 檢漢城公派, 일명 항(妨), 자 취원(輝遠). 호 운강(雲江)

죽계 인홍(竹溪 仁洪)의 5대손이요 성하(成廈)의 3자로 광해군(光海君) 13년 辛酉 12월9일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신동(神童)으로 일컫더니 장성함에 백형 형(炯)과 함께 신독재 김 집(愼獨齋 金 集) 선생을 쫓아 학문을 익히니 선생께서 매우 중히 여기시고 성리서(性理書)를 가르쳤는데 아무리 어려운 곳이라도 공께서 문득 관통(貫通)하여 강론(講論)이 익숙하므로 선생께서 매양 "우리 유도(儒道)에 사람이 있도다"하시고 기뻐하였다. 한편 순찰사(巡察使) 가 천거하여 이르기를 "문사(文辭)가 우월하고 이학(理學)이 고명하다."고 누차 주상(主上)께 천거하였다.
49세 되던 현종(顯宗) 10년 己酉(1669)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이듬해 겨울에 동음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더니 얼마 안되어 공조좌랑(工曹佐郎)으로 옮기었다. 조정에서 남대(南臺)에 추천하였으나 시사(時事)가 돌변하여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나가 부임한지 겨우 14개월만에 관직을 사임하고 은진 채운(恩津 彩雲)으로 퇴거하였다. 그 지명이 채운(彩雲)이요, 또 대강(大江)이 앞에 흐르므로 운강거사(雲江居士)라 자호하고, 생도들을 모아 가르치고 인도 하므로써 낙을 삼으니 사방의 학도들이 배움을 칭하는 자 날로 많아졌다.
당시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미촌 윤선거(美材 尹宣擧) 등이 돈암서원(豚巖書院)에 모여 연일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공이 백형 형(炯)과 함께 참석 강독하니 제군자(諸君予)가 지목하여 말하기를 "저 형제중에 누가 우수할고"하니, 우암(尤庵)이 말하기를 "성품이 순진하기는 형이 우수하고, 심법(心法)을 거두기는 아우가 우수하다"하니 좌중에서 모두 확실한 지론(持論)이라 하였다.
일찌기 율곡 이 이(栗谷 李 珂). 우계 성 혼(牛淺 成 澤)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고자 팔도에 통문을 낼 적에 우암께서 특별히 공을 호서(湖西)의 소두(疏頭)로 정하니 당시 생원(垈員). 진사(進士)로서 상소에 참여한 이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소두(疏頭)에 적임자를 얻었다"고하였다.
현종(顯奈) 2년 幸丑(1661)에 큰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각도에 어사(御史)를 파견, 진휼(賑恤)을 감독케 하였는데, 일휴당 이 숙(逸休垈 李 肅)이 호남(湖南)에 내려와 진사(賑事)를 행하였다. 이때에 공께서 선친상(先親 喪)을 당하여 전주(全州)고향에서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공(李公)이 와서 조문하고 진휼(賑恤)의 계책을 자문하였다. 공께서 급히 조처할 10여 조항을 제시하니 이공이 가합하다 극한하고 그 후에도 난처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서신으로 물어 시행하였다.
공께서 연산(燕山)에 계실적에 가옥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독재(愼獨齋) 선생께서 "우리 무리에 이런 사람이 없어서는 안된다."하시고 원전(院田)을 내놓고 또 여러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재물을 내어 집을 지어 거처토록 하시니, 고을에서 말하기를 "류 모(柳 某)는 살아서 사당(祠堂)을 얻었다."고 하였다.
동음교관(童蒙敎官)으로 서울에 올라가니 장안(長安)의 사대부(士大夫)틀이 자제들을 다투어 보내 수업하도록 하였다. 공께서 학규(學規)를 엄히 정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규칙을 실천토록 함으로 어린 학동(學童)들까지도 읍양(揖讓)과 응대(應對)에 각기 법도를 지키니 장안에서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이제껏 이와 같은 교관(敎敦)은 없었다"고 칭송하였다.
그후 승진하여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도 가르치는 방법이 교관 때와 같으므로 상사(上司)가 다 너그럽게 대하고 이사(吏事)로써 꾸짖는 일이 없었다. 이로서 문하의 생도들이 성취하여 출세한자가 심히 많았다.
숙종(肅宗) 29년 癸未 10월11일에 향년 83세로 돌아가셨는데 며칠 후 나라에서 사헌부장령 (司憲府掌令)으로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이미 돌아가신 후인지라 그 후 수직(壽職)으로 가선(嘉善)의 가자(加資)가 내리었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찬연(燦然)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중형 욱(澳)의 3자 백능(百能)으로 계자(系子)하였다.
공의 묘소는 김제군 백산면 두모동 계좌(金堤郡 白山面 斗毛洞 癸坐)에 있다. 행장은 조카 불후당 백승(不朽堂 百乘)이 지었다.
황간(黃澗) 고을에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가 세워져 있고 정조(正祖) 21년 丁巳(1797)에 전주 오강서원(全州 梧岡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朝鮮王朝責錄. 行狀 靜奮堂誌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