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회근(柳晦根), 백강공(栢岡公), Ryu, Hoe-Geun, 생몰년:1612-1676, 세:22
顯宗朝 孝行, 掌令公派, 자 엽재(曄哉). 호 백강(栢崗).
현감 임호 세온(縣監 臨湖 世溫)의 손이요 사용 경문(司勇 慶門)의 장자로 광해군(光海君) 4년 壬子에 초계 성산(草溪 城山)에서 태어났다.
공께서 출생 후 바로 모친을 여의고 7세에 부친마저 돌아가심에 조모 성씨(祖母 成氏)의 양육으로 성장하였다.
정곡 조신천(靜谷 曺信天)을 사사(師事), 학문을 닦고 이형핀원(李亨源)과 우의가 가장 두터웠으며, 조하생(曺夏生). 노석후(盧碩厚)로 더불어 상례문답(喪禮問答)을 저술하여 예문(禮文)으로 향리에서 명성이 높았다.
일찍 부모를 여인것을 통한하여 종신토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한편 조모(祖母)와 계모 문씨(繼母 文氏)를 지성으로 섬기고 돌아가심에 3년을 죽을 먹고 내정(內庭)을 출입하지 않았으며, 아우와 자매로 더불어 우애가 독실하였다. 그리고 남의 곤궁하고 위급함을 보면 힘껏 구제하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하고, 남과 교제함에 흉금을 털어놓고, 의리를 분별하여 절연한 지조를 보이었다. 항상 공(公)자를 손바닥 위에 써놓고 말하기를 『내 일생에 힘쓴 바가다만 이 공자 뿐이었다.』하고 공(公)자로서 여러 아들의 자(字)를 지어 주었다.
황강(黃江)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소요하며 영화를 구하지 않고 당박하게 여년을 보냈다.
숙종(肅宗) 2년 丙辰에 돌아가시니 향년 65세로 처음에 고을 동쪽 다라곡 선영하(多羅谷 先塋下)에 장례를 치렀다가 후에 고을 북쪽 운봉산 유좌(雲峰山 酉坐)로 이장하였다.
공의 행장은 창랑 노 의(滄浪 盧疑)가 짓고, 묘갈명은 간옹 이헌경(民翁 李離慶)이 지었다.
배위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증지평 이침(贈持平 以沈)의 따님으로 어진 부덕(婦德)이 있었다.
4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부(敷). 철(徵). 휘(徽). 창(敞)이며, 사위는 광주 노한명(光州盧漢明). 옥산장 면(玉山張 覓). 포산 곽송수(苞山 郭松壽). 성주여만거(星州呂萬擧)이다.
장자 부(敷)는 자 공원(公遠). 호 송악(松岳)인데 체모가 준수하고 심성이 침착하여 희롱을 좋아하지 않더니 현와 이 도(弦潔 李 도)에게 수업, 마침내 학문을 성취하여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경시(京試)에 낙제하니 이움에서 모두 애석히 여기었다. 부모를 섬길에 색양(色養)을 능히 하고 우애가 또한 지극하여 부친 상중(喪中)에 3년을 죽을 먹고 겨우 소상(小祥)을 지낸 후 여막(廬幕)에서 돌아가셨는데 임종(臨終)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모친이 생존하셨는데 능히 봉양하지 못하고 또한 삼상(三祥)을 마치지 못한채 죽게 되니 이는 나의 막심한 죄이다. "하고 또 "거처에 공손함을 다하고 일에 임하여 공경을 다하며 남과 더불어 성의를 다하라"는 말을 글로 써서 자제들에게 주고,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2자 철(徹)은 자 공달(公達). 호 소백(小柏)인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고 훌륭한 사행(事行)이 읍지(邑誌)에 실렸으며 필법(筆法)이 뛰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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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 휘(徽)는 자 공미(公美)인데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재임중 청렴하고 검박하여 임기를 마치고 들아옴에 행장(行裝)이 초라하여 다만 필연(筆硯)이 있을 따름이었다.
4자 창(敞)은 자 공현(公顯)인데 일찌기 문사(文詞)가 뛰어나더니 만년에 예학(禮學)을 닦아 세상에서 운촌거사(雲村居士)라 일컫었다.
※ 墓碣銘. 追先錄.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