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혼 (柳渾)

류혼(柳渾), 승지공(承旨公), Ryu, Hon, 생몰년:?-?, 세:19.
明宗朝 淸白吏, 中門祇候使公派. 자 호숙(浩叔)

중랑장 중의(中郞將 仲宜)의 5대손이요, 돈녕부부정 수천(敦寧府正 壽千)의 장자이다.
일찍이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중종(中宗) 36년 辛丑(15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년 12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승진한 후 내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明宗) 3년 戊申(1548) 6월 고양군수(高陽郡守)로 재직중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곤고(困苦)가 매우 심했는데 공께서 진휼(賑恤)에 전력을 다하여 구원하니 온 고을이 그에 힘입어 온전하였다.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이 사실을 주달(奏達)하여 일품계(一品階) 특전의 영광을 무릅썼다.
7년 壬子(1552) 10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전임하였는데 동년 11월 조정에서 공을 위시하여 청렴 근신한 관리를 선발, 대궐 뜰에 잔치를 베풀고 단목(丹木), 호초(胡椒), 백납촉(白蠟燭)한쌍을 각기 하사하는 은전(恩典)을 베품과 동시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하였다.
이듬해 6월 사헌부집의(司憲府集義)에 옮기고 10년 乙卯(1555) 4월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로 나갔으며, 그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20년 乙丑(1565) 정월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전직되고 이듬해 3월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상은 공의 관력(官歷)이고, 생졸(生卒)은 미상하며, 묘소는 양주 외송산 곤제동(楊州 外松山 昆弟洞) 현재 의정부시 낙양동(議政府市 洛陽洞) 선영 백호등(先塋 白虎嶝)에 모셔져 표석(表石)이 있다.
배위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순인(順仁)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다.
장자 세신(世新)은 음사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우봉현령(牛峰縣令)으로 재직 중 선조(宣祖) 23년 庚寅(1590) 정월에 노쇠(老衰)함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2자 사신(思新)은 자 중화(仲華)인데 중종(中宗) 21년 丙戌(1526) 생으로 명종(明宗) 10년 乙卯(1555)에 생원 진사 양시(生員 進士 兩試)에 급제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한림(翰林)에 발탁되었더니 15년 庚申(1560)에 예문관검영(藝文館檢閱)에 재직중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21년 丙寅(1566) 9월에 복직 병조좌랑(兵曹佐郞)에 기용되고, 그 후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승진하여 얼마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의 후손이 광주군 언주면 신사리(廣州郡彦州面 新沙里) 지금 서울 강남구 신사동(江南區 新沙洞)에 세거하고 이있다.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