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홍 (柳泓)

류홍(柳泓), 증참판공(贈參判公), 이의재공(履義齋公), Ryu, Hong, 생몰년: 1557~1593, 세:19
검한성공파. 임란순절 선무원종공신2등 회양부사참판공
병조참판(兵曹參判) 추증(追贈),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

류홍;1557-1593 자는 홍도(弘度)이니 호는 이의재(履義齋) 검한성공파 대승공 19세 선조조문인 임란시 순절. 충렬절신. 선무원종공신 2등. 호국사 배향, 언동사 배향
휘는 홍이요 가정(嘉靖) 정사(丁巳)1557년에 출생하셨으며, 지기(智器)가 총명하고 풍도(風度)가 괴위(魁偉)하며 문무(文武)가 겸전(兼全)하였다. 검교한성판윤 원현(元顯)의 六代손이요. 한림대사성(翰林大司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류선(柳善)의 현손이다 고는 병조참의 덕용(德容)이요 비는 안동김씨(安東金氏)니 현감 이(洢)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갑신(甲申)1584년 27세에 무과에 등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충분의격(忠憤義激)하여 선조몽진(宣祖蒙塵)에 백의로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당도하였다가 전세(戰勢)가 급박함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영(軍營)에 종사관(從事官)에 제수되고, 이어 부장(部將)으로 승임(陞任)하여 좌방어사(左防禦使) 정희현(鄭希賢)과 대소전투(大小戰鬪)에 참전하였다.癸巳正月 이차평양 대전시 含毬門밖에 진을 치고 임전할새 중과부적으로 전세는 위급했다. 전항은 급박한데 좌방어사 정희현은 왜적과 대전을 회피하고 진두에 나가 싸우지 않고 항상 전진 뒤에서 안일과 향락을 즐기며 주장의 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일은 이원익과 더불어 성하에서 대전을 치를 때도, 청나라원병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도 역시 나가 사우지 않고 퇴하여 이암 (貍巖) 십여리 후방에 주둔하고 기생을 싣고 다니며 신안(身安)을 꾀하였다. 이때 공은 평양성함락이 경각지간인데 이대로 방어사의 령을 쫓을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하며 제 장졸들과 더불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을 서천맹산하고 팔뚝을 걷어붙이고 창칼을 집고 제장졸에『 우리들은 이 나라의 록을 먹은 신하들이라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남아장부의 의로운 일이다. 죽은들 무엇이 유감이 있으랴(吾等은 具而世祿之身 爲國死 義大丈夫之事라 死亦何感乎』크게 외치기고 적진에 뛰어들어 무수한 왜구를 무찌르고 장렬히 순절하다. 정희현은 종사관(從事官) 류홍(柳泓) 및 군인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는데도 문책을 두려워 모두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후일 비변사의 장계로 조정에 알리니 선조대왕이 보시고 크게 슬퍼하시고 전지에 사당을 세워 공의 충혼을 위로하라 명하시고 가선대부병조참판을 증직하고 선무원종공신이등에 책훈하고 또 이르기를 그 훈공을 후세에 전하여 자손이 영광을 누리도록 세상에 알리라 유시하였다 一九九三年 계유에 충남보령 호국사(護國祠)에 配享되고 2009년 화순 언동사(彦洞祠)에 추배하였다 2010년 공의 기적비가 경기도가평군하면 신상리에 세워졌다비문은 후손 도산영렬이 지었다. 공의 고는 지효로 효자정려를 명받았고 公의 갑옷과 장검은 제 백천공(百泉公) 류함(柳涵)은 에게 전하는데 형의 충절을 흠모하며 무예를 닦드니 병자호란 시 창의하여 맹주(盟主)로서 국란평정에 공이 빛났다. 계매(季妹)는 최서생(崔瑞生)의 부인으로 순종하여 열여정문을 세우니 충효의렬(忠孝義烈)의 사덕이 일문양대에 걸쳐 현요하였다. 공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하면 신하리 해좌원에 나라에서 예장한 후 사패지지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손이 세거하여 문화류씨 가평종중과 망덕종중을 형성하고 있다. 공을 장사지낸 후 400여년이 지나도록 행장과 묘갈과 기적비를 세우지 못하였다가 이제 인쇄문명의 인터넷문화의 발달로 선조실록 및 선무원종공신록권등 각종자료가 세상에 나와 국사에 근거하여 공의 행장을 새로 짓고 묘갈를 세웠으며 신상리 000번지에 7척 기적비를 크게 세워 공의 충절을 세상에 밝히게 되었다. 배는 정부인 광산김씨이니 형조좌랑 윤(玧)의 女요 자는 응량(應良)이니 회인부사(會寧府使)로 선무원종공신이요 손은 元이니 통사랑광능참봉이요 증손은 천민(天民)으로 가선대부 도총부부총관이니 후손이 번성하고 현달하여 아름다운 가업을 계승하였다 백천공(百泉公) 류함(柳涵)의 후손 류태종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이의재공의 유품중 장검과 갑옷은 화순 종손 집에 소장되어 내려 왔는데 6.25전란 시 실전되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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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선무원종공신록권. 문화군파보. 검한성공파보. 화순열역재묘갈. 환산정중수기

 

번역문
만역(明)삼십삼년(선조38년乙巳1605)4월16일 행도승지 신 신흠은 삼가 專旨를 받듭니다.
나라가 심히 어려워 쓰러지려 할 때 그대는 중히 나라를 일으키려는 일에 힘을 베풀었으니 그 공이 적지 않았으나 내 이를 갚지 못했노라
내 이에 原從功臣으로 녹훈한다. 이에 옛 章規를 좇아 새 式典을 크게 擧行 하노라. 생각하건대 남쪽 도적이 어지러이 날뛰어 서토(西道)로 播越할 제 虎豹들의 縱橫을 참혹한 광경을 보았노라
宗廟와 社稷이 蒙塵할 새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
군신들 중에는 노천에서 대의를 일으키고 저 함을 부모를 건즘과 같이 하였으며 인민들은 가히 나라를 바로세우고자 함에 대소가 몸을 망치면서 난을 평정하였기에 어가가 환궁 하였노라. 드디어 策勳하고 鐘鼎에 새기노니 卿士大夫로부터 士庶人에 이르기까지 혹은 우리의 武烈을 드날리게 한 자, 혹은 우리의 軍需를 도운 자. 창을 잡고 달려 나온 자, 혹은 몸을 버린 선비, 병기를 끌고 싸워 무찌른 자, 혹은 머리를 베어 바친 무리들까지 여기에 모두 기록하여 오래도록 후세에 전하게 하라. 모두 경하고 중한 것을 생각하고 일시의 공로를 분별하여 그 자제와 그 자손이 萬世에 安樂을 누리게 하라. 고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함을 생각하여 宣武原從功臣 二等에 敍勳함을 모두에게 알리라.
玩月齋에서 道山 柳暎烈 譯

宣武原從功臣錄券
萬曆三十三年 四月十六日 行都承旨 臣 申欽 奉敎
傳旨宣武原從功臣一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 及後世父母封爵二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 宥及後世子孫中縱自願加散官一資其中無子孫 者兄弟婿姪中縱自願加散官一資三等乙良各加 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爲乎矣各等通訓以上乙 良子孫兄弟甥姪女婿中一人縱自願加散官一資 物故人乙良各依本等施行爲称各追贈一資爲齊 犯罪作散人乙良並於本品叙用爲齊永不叙用人 乙良許通仕路爲齊職牒收取人乙良並只還給爲 齊妾子乙良限品安徐爲齊公私賤口乙良免賤爲 齊係干逆黨及逆賊公事間事被罪者乙良官爵一 款擧行安叙爲只爲下吏曹爲良如敎
【선조38년 9만역 33녀 1605)4월16일 행도승지 신 신흠 삼가 상벌에 관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한다.
선무공신 일등을랑 각자 품계를 한자리씩 높여 주고 그의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게 하고 부모에게는 봉작을 주라.
이등 을랑 각자 품계를 한자리씩 높여주며 음덕으로 후손에게는 산관을 주어 후손들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며 만약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나 조카, 생질, 중에서 산관을 주라.
삼등을랑 각자 품계를 한 자리씩 높여주고 자손들에게는 훌륭한 선조의 음덕을 잇게하라. 그리고 각등급의 통정대부이상의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사람을 골라 산관을 주어 공을 잇게 하며, 죽은 사람을랑 본 법에 의하여 시행토록하며 품계를 한자리씩 높여 추증토록 하라.
죄를 짓고 면제되었어도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랑 다시 임용토록하며 그리고 영원히 재 등용할 수 없는 사람을랑 벼슬에 나가도록 허락해주어라. 직첩을 회수한 사람을랑 반환토록하며 첩의 자식을랑 법의 태두리 안에서 거두도록하고 공사를 막론하고 노예로 부리고 있는 사람을랑 노예를 면해주게 하라. 역당과 역적으로 인하여 죄를 저지른 사람을랑 벼슬자리를 마련하여 서서히 쓰도록 하게하고 이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라고 하셨다. 】

왕조실록 선조대왕실록 영인본21권 631면
비변사가 아뢰었다.
“지난번에 이일(李鎰)의 장계를 보니 ‘정희현(鄭希玄)은 전에 조방장(助防將)으로 있을 때 접전할 적마다 항상 남의 뒷전에 있었고, 방어사(防禦使)로 승진해서는 교만 방자하여 주장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일이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성 아래서 격전을 할 때 희현만 전진(戰陣)에 나가지 않았으며, 그 뒤 7일 중국군이 평양을 공격할 때에도 희현은 역시 나가 싸우지 않고 물러나 이암(狸巖)의 십여 리 되는 지점에 진을 쳤다. 종사관(從事官) 류홍(柳泓) 및 군인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는데도 모두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북도로 파송되자 또 우회해 가서 17일에야 비로소 성천(成川)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3일이나 머물다가 기생을 싣고 갔다.’고 하였었는데, 당시에 군율(軍律)에 따라 처치해야 했으나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는 중이었으므로 즉시 처치하지 못했었습니다. (선조대왕실록35권의 21면=영인본;21권631면)

선무원종공신록권의 전지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 9천 60명을 계하한 전지(傳旨)에,
“국가가 어려움이 많아 안정되지 못하자 그대들이 이미 중흥시키는 일에 힘을 썼으니, 공훈을 작은 것일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내가 이에 원종(原從)에 추은(推恩)하여, 새로운 의전(儀典)을 크게 거행하여 옛날 전장(典章)을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남쪽 왜적이 날뛰어 서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였고 마구 날뛰는 시호(豺虎) 때문에 참혹하게 종사가 몽진(蒙塵)하였으며 산 넘고 물 건너는 고달픈 여로에 군신(君臣)이 이슬 맞던 일을 차마 말하겠는가. 하늘이 이 나라를 중흥시키고자 부모(父母)같은 중국이 우리를 구제해 주었고, 사람들이 그래도 고국을 떠받들어 대소 신료들이 노고를 잊어버려, 다행히도 난리를 평정하고 환궁하여 마침내 공훈을 책봉하고 종정(鍾鼎)에 새기었다.
그대들 경대부 및 사서인(士庶人)이 혹은 우리 무열(武烈)을 선양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 군수품(軍需品)을 돕기도 하였으며, 몽둥이를 들고 치달려 목숨을 바친 선비도 있었고 무기를 들고 싸워 헌괵(獻馘)한 무리도 있었기에 여기에 모두 기록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경중에 따라 일시의 공로를 구분하였으니 그대의 자손들은 만세토록 안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교시(敎示)하니 잘 알기 바란다.”
하였는데, 이조에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104책 186권 11장 A면
【영인본】 25책 53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