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분(柳希奮), 판서공(判書公), Ryu, Hui-Boon, 생몰년:1564-1623, 세:21
光海朝 文臣. 中門祇候使公派.자 형백(亨伯), 호 화남(華南)
문양부원군 자신(文陽府院君 自新)의 3자로 명종(明宗) 19년 甲子에 태어나 선조(宣祖) 23년 庚寅(1590)에 생원, 진사(生員 進士)에 급제하였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으로 세자(世子)를 호종(扈從)하고 현감(縣監)으로 재직중 30년 丁酉(159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더니 32년 己亥(1599)에 수찬(修撰)으로 옮겨 류성룡(柳成龍)을 탄핵하다가 파직 당하였다. 34년 辛丑(1601)에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있다가 이듬해 응교(應敎). 겸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로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된 역대 실록(歷代 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 사서(司書), 직강(直講)을 거쳐 36년 癸卯(1603)에 사옹원정(司饔院正)에 제수되고, 이듬해 응교(應敎),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등을 역임하고 40년 丁未(1607)에 사성(司成)을 거쳐 이듬해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등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 즉위와 함께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라, 소북(小北)의 류영경(柳永慶) 일파를 탄핵, 숙청한 후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大北)에 속하여 외척(外戚)으로서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 이조(吏曹),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두루 역임하고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다.
9년 丁巳(1617)에 세자시강원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진되었는데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그 부당함을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癸亥(1623)에 반정(反正)이 일어나 권세를 탐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하니 동년 4월 4일 이었다.
배위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참봉 질(參奉 ?)의 따님으로 2남 4녀를 두었고 묘소는 양근 왕충리(楊根 王忠里)에 합부로 모셔졌다.
장자 정립(正立)은 자 방숙(方叔)이니 선조(宣祖) 31년 戊戌(1598)생으로 광해군(光海君) 13년 辛酉(1621)에 호군(護軍)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며, 2자 명립(命立)은 자 락부(樂夫)이니 선조(宣祖) 33년 庚子(1600)생으로 광해군(光海君) 10년 戊午(1618)에 장원하고 13년 辛酉(1621)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한림(翰林)으로 있다가 반정이 일어나 장흥(長興)에 유배되었더니 14년 후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에 사면되었으나 서울로 돌아올 뜻이 없어 경상도 창원(慶尙道 昌原)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다. 총명함이 뛰어나 일찍이 문명(文名)이 있었고 계곡 장유(溪谷 張維)와 송교 이무(松郊 李?)가 실록을 편수할 때 공이 사관(史官)으로 재직중 광해군(光海君)의 혼정(昏政)을 당하여 직필(直筆)이 많은 것을 보고 그 무죄를 인정하여 수차 추천함으로써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서용(敍用)하라는 특명이 있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25년 丁亥(1647)에 창원에서 돌아가니 겨우 48세였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묘갈명을 지었다.
사위는 참의 양주조유도(參議 楊州趙由道). 감역 청주경유후(監役 淸州慶有後). 현감 창녕조실구(縣監 昌寧曺實久)이며, 서자에 익립(益立)은 광해군 13년 辛酉(1621)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지내고, 복립(福立)은 주부(主簿)요, 위립(衛立)이 있었다.
※ 朝鮮王朝實錄 : 朝野輯要 :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