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철 (柳希轍)

류희철(柳希轍), 선산공(善山公), Ryu, Hui-Cheol, 생몰년:1453-1514, 세:17
中宗朝 淸白吏, 中門祇候使公派, 자 사제(思齋)

광주목사 곡(光州牧使 穀)의 2자로 단종(端宗) 원년 癸酉생이다.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성종(成宗) 20년 己酉(1489) 생원시에 급제하고, 연산군(燕山君) 원년 乙卯(149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재임 중 3년 丁巳(149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하였다.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6년 庚申(1500) 2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발탁되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고자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고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성(司成)을 역임하면서 직분에 진력하였으나 왕의 뜻을 거슬려 마침내 10년 甲子(1504) 3월에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되고 얼마 후 임피(臨陂)로 부처(付處)되었다가 다시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인하여 귀양이 풀려 2년 丁卯(1507) 8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발탁되고 얼마 후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가 청렴과 근신으로 정사를 행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공을 사랑하여 부모와 같이 여기고 공경하였다. 당시 성주 목사 권 주(星州牧使 權 輳)와 금산근수 문 근(金山郡守 文 瑾)으로 더불어 영남삼량(嶺南三良)이라 일컫었다.
만기 후 내직으로 들어와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승진하여 향년 62세로 돌아가시니 때는 중종(中宗) 9년 甲戌 10월 29일 이었다.
동년 12월 공조판서 안 침(工曹判書 安 琛)의 계주(啓奏)로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됨과 아울러 그 아들을 관직에 채용하라는 특명이 내리었다.
공께서 천성이 관후 엄정(寬厚 嚴正)하고, 명백 근신(明白 勤愼)하며 청렴 검약(淸廉 儉約)하여 유희(遊戱)를 즐기지 않고 성색(聲色)과 화리(貨利)에는 더욱 담박하였으며, 평생에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즐겨 외우고 특히 역리(易理)에 정밀하였다.
이듬해 임천 만지동 신사 선영 간좌(林川 晩智洞 新寺 先塋 艮坐)에 장례를 모심과 동시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갈명은 공의 친구인 이조참판 성몽정(吏曹參判 成夢井)이 지었다.
명(銘)에 이르기를 『학문이 넉넉하고 덕이 훌륭하였는데 관직은 어찌 높지 않았으며, 관직 생활 20년에 집은 어찌 넉넉하지 못했던가? 시운(時運)이요 천명(天命)이니 어찌할 것인가 공이시여!』하였다.
배위 평창이씨(平昌李氏)는 현감 영상(縣監 永祥)이 따님으로 1남을 두었고,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만호 숭(萬戶 崇)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빙고별좌 맹연(氷庫別坐 孟連)과 중연(仲連)이요, 사위는 영월신응경(瀛越辛應卿)과 성산이사중(星山李思中)이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國朝榜目, 淸白吏錄, 墓碣銘

[입력: ryuj 090610]